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불빛 Jan 16. 2024

결코 사소하지 않은 발걸음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라던 아이가 처음 받아보는 애정과 환대. 작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된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는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따듯한 감정을 섬세하고 투명한 묘사하는, 아름다운 한 여름밤의 꿈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100쪽가량의 잘 짜인 다정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문득 찾아오는 불안한 감정이 있었다. 분명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야기는 그대로 아름답게 끝나버린다. 정말, 세상이, 사람이 이렇게 친절하고 따듯하다고..?


<맡겨진 소녀>의 성공에 힘입었는지 연달아 번역 출간된 클레어 키건의 2021년 작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이 정체 모를 불안감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 작품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맡겨진 혹은 버려진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아일랜드 국가가 자금을 지원했던 ‘막달레나 세탁소 Magdalene asylum’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수녀회에서는 매춘부, 미혼모 같은 ‘타락한 여성’들과 성폭행 피해자, 고아, 정신병 환자 등 버려진 소녀들에게 거처를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이들을 마구잡이로 강제 수용하고 착취했다. 


주된 노동은 세탁. 세탁기가 없던 시절, 강제 노역을 통해 일종의 사회복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무보수, 무휴일의 노동 속에, 매질과 굶주림은 예사였으며, 미혼모들의 아이를 빼앗아 강제 입양을 보내던 세탁소들은 아일랜드 곳곳에서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속되었다. 타락하고 버려진 이들의 '회개와 재활'을 목표로. 


(이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약스포).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있던 한 평범한 인물의 발걸음을 다룬다. 가족의 미래만 생각하며 힘겨운 노동의 삶을 살아가던 석탄 상인 빌 펄롱.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 중에 그는 수녀원의 높은 담벼락 너머에서 벌어지는 한 소녀에 대한 학대의 현장을 목격한다. 마을 사람들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던 현실. 펄롱은 빠듯한 집안 살림을 걱정하는 아내와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녀야 하는 딸들을 떠올린다. 전혀 모르는 한 소녀에 대해 선의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어두운 수녀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힘겹게만 지켜온 일상은 깨지고 가정에 대한 책임은 버려질 테니.     


이렇게 <맡겨진 소녀>의 따듯함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차가움을 만난다. 희망, 기쁨, 사랑이라는 따듯함은 우선 나와 내 가족이 그리는 동심원을 지킬 수 있는 한도에서 맴도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평범한 소시민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당연하게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지 않은가.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아내와 딸들이 기다리고 있는 따듯한 집이 아니라, 차갑기만 한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와 무관한 타인의 고통에 굳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롱은 인간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그 희미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선택을 한다. 누추한 구유에 평온하게 누워 있는 아기 예수의 앞 날을 보는 것 같은, 고귀하면서도 그만큼 가슴 아픈 선택. 세상은 결코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차가운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듯함을 향해 결코 사소하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는 한 인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작가의 이전글 짜깁기당하는 인류의 생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