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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Writes Feb 18. 2020

떨리더라도, 네 목소리를 내

호주 시골에서 3년 

 김을 먼저 깔고 배합초를 섞은 고슬고슬한 밥을 손바닥으로 잘 펴준다. 사시미용 연어를 길게 썰어 가운데 놓고, 초승달과 반달 사이 모양의 아보카도 한쪽을 넣는다. 김밥을 잘랐을 때 보이는 면에 아보카도의 가장 통통한 부분이 오게 하는 것이 비법이다.  또다시 김을 깔고 그 위에 밥을 힘을 뺀 손바닥으로 펼친 후 튀긴 치킨과 새우를 각각 아보카도 한쪽 씩 옆에 줄지어 만다. 김을 반장으로 갈라 만들면 김발이 없어도 모양 잡기 쉽다. 김 끝부분을 손가락을 물에 찍어 적셔 준다. 붙인 부분을 바닥으로 가게 잠시 놓아두면 옆구리가 터지지 않고 잘 붙는다. 적당히 잘라 도시락을 만들고, 진열장에 넣어 두면 손님들이 오기 시작한다. 

‘연어롤 하나 주세요.’ 한눈에 보아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웅얼거리듯 말한다. 내 눈은 바쁘게, 그 뒤의 보호자를 찾는다. 아이는 혼자다. 종이봉투에 연어롤을 담아 주고

‘3달러 50센트예요.’라고 대답한다.

아이는 천천히 지갑에서 3달러와 50센트를 꺼내어 계산대에 올리고 맞은편 맥도널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캔버라에 있을 때. 같은 학교 학부모 중 한 명이 잠시 그녀가 한국에 다녀오는 동안 일하던 초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대타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약 2달쯤 초밥집에서 초밥을 말고 팔았다. 그 여자아이는 방과 후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쇼핑센터를 찾았다. 가끔은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가끔은 일본식 국수를 사 먹었다. 그 아이 말고도, 몸이 불편 해 보이는 또래 아이들이 여럿 쇼핑센터를 찾곤 했다. 그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혼자서 이 쇼핑센터로 와 간식거리를 사 먹었다. 호주에 와서 눈길을 끈 것은 장애인들을 자주 만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빅 더블유에서 새로 나온 아이폰으로 게임을 해보다, 역시 옆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의 규칙적으로 내지르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한눈에도 그는 틱이나 뚜렛이 있는 사람이었고, 몸은 불편해 보였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몸이 불편한 사람, 정신 지체가 있는 사람 여러 명이 신나 하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도서관에서도 공원에서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났다. 여느 일상인 듯 사람들은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누구도 ‘몸이 불편하면 집에 안 있지, 왜 여기 나와 있어?’ 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참 좋아 보였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25년쯤 전, 중학교 2학년 때 집에서 버스로 30~40분 거리의 한 보육원에서 한 달 가량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여름 방학 동안 자원봉사를 할 사람을 뽑았는데, 별로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선생님이 어쩌냐~ 하는 소리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내가 '제가 가볼까요?'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이다. 처음 그 센터를 방문하던 날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이전 십몇 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나는 장애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시설은 장애가 있는 고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는 곳이었다. 배는 부풀어 있고 팔다리가 너무 가늘어 바닥에 누워만 있는 아이, 사지가 마구 꼬아 있는 아이, 사지 중 하나가 없는 아이 내 또래의 아이들은 그렇게 가구도 변변히 없는 방들에 모여 있었다. 나이가 어린 나는 기저귀는 갈아주지 않고, 청소를 하거나 밥을 먹여 주는 일을 도왔다. 한 번은 특식으로 라면에 밥을 만 것이 식사로 나왔다. 아이들은 좋아하며 참 잘 먹었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라면을 먹지 못했다. 라면만 보면 기저귀 밖으로 새어 나는 배변 냄새와 라면 냄새와 그리고 퉁퉁 불은 라면과 밥의 끈적끈적한 느낌이 생각나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중 2 여름 방학 후 나는 학교에서 표창장을 하나 받았고, 그 이후로도 거리에서 장애인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들은 호기심의 눈빛이나, ‘몸도 불편한데 왜 나와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거야.’라는 따가운 눈빛을 사방에서 받고 있었건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몇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릴때 부터 자라온 그 아이들을 신기하게 보거나,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아이들은 그저 이 마을의 풍경이었다. 그 아이들은 마을 파티에, 운동 경기에, 가게에 어느 곳에나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여자 아이가 참 좋았다. 그 아이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를 볼 때마다, 

‘당신이 달이의 언니인가요?’라고 물었다. 내 딸의 언니같이 보인다니… 그런 달콤한 말을 하는 아이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언젠가부터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Speak  even If your voice shakes.’이라는 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읽어 보니 학교 폭력에 관한 캠페인이었다. 사이버 폭력에 시달리던 14살의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녀가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을 이용해 시작된 캠페인이었다. 아무리 두려워서 목소리가 떨려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게 학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에게 하는 말인 줄 았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해하기로는 그것은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어린 소녀가 죽음까지 생각한 상태에서 외쳤던 도와달라느느 요청이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혹은 내가 피해를 볼까 봐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말고, 떨리는 목소리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내 일이 아니라도 필요하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두려움에 목소리가 떨리더라도. 나도 작은 목소리를 내 볼까 한다. 한국에서도 장애인들이 거리를, 쇼핑센터를 신나게 놀러 다녔으면 좋겠다. 그걸 보는 시민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도 흐뭇하게도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냥 한국의 한 풍경이었으면 좋겠다. 좀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들, 또래보다 느린 아이들, 행동이 다른 아이들을 보는 눈빛이 날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이 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저 전략이 필요할 뿐이에요.'라고 안아줄 수 있는 선생님이 한국에도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작은 목소리를 내어 보았자, 나는 아무도 아니라서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내 목소리에 조금 힘이 생기게 열심히 살아 봐야겠다.  

14살 돌리가 숨지기 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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