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저녁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씻고, 책을 좀 읽다가 잠자리에 누웠다. 바로 잠이 오지 않은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지만, 이내 잠이 들었다. 나 말고 우리 집 준이가.
그렇게 아이가 먼저 자고, 나와 남편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아이 손을 잡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손이 평소보다 너무 뜨겁다. 다시 더듬어서 이마를 짚었는데, 세상에나! 이마는 더 뜨겁다. 눈이 번쩍 떠졌다. 체온계를 찾아서 열을 재었다. 금세 빨갛게 물들어 버린 체온계는 38도가 넘어 있었다. 자는 아이를 깨워서 해열제를 먹였다. 감기인가? 왜 열이 나지? 잠들기 전까지 괜찮았는데? 아이는 해열제를 먹고 잠이 들었지만, 나는 그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평소 같으면 해열제를 몇 번 먹고 나면 열이 떨어지는데, 고열은 금요일에도 지속되었다. 마침 금요일은 휴교일이어서 집에서 쉴 수 있었다. 아이를 쉬게 하는 건 좋은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우리 가족이 토요일, 일요일에 나가사키 여행을 가기로 계획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이미 호텔을 예약하고, 신칸센 기차표까지 발권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이 컨디션이 회복할까, 지금과 비슷한 상태라면 여행은 무리인데. 걷기 위주의 여행을 아무리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한들, 고열에 시달린 아이와 이 무더위에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들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없이 늘어났다.
하지만 슬라임처럼 늘어나는 고민들은 그대로 둔다고 해결되지 않는 법이었다. 어떤 식이든 움직여야 했다. 나와 남편은 호텔과 호텔 예약 사이트에 연락해 보기로 했다. ‘환불불가’ 상품이지만 상황을 말하면서, 최대한 낮은 자세로, 비굴하고 불쌍한 자세를 취해보기로 했다.
구구절절 읍소한 메일에 답이 왔다. ‘아이가 아프다.’는 문구가 담당자의 심금을 울린 건지, 환불불가 상품인데도 이번만큼은 특별히 수수료 없이 환불을 해 주겠다는 거다. 혼또니 아리가또고자이마쓰! 상황이었다. 호텔 담당자의 메일을 예약 사이트에 전달하니, 바로 전화가 왔다. 그렇게 수수료 없이 환불이 되었다.
발권한 신칸센 표는 여정 변경을 위해 하카타역에 가야 했다. 무료로 한 번은 변경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하카타역으로 가는 번거로움만 빼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남편이 기차표를 들고 하카타역으로 갔다.
그 사이 아이는 아침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깼다. 여행 걱정을 하는 아이에게, 다 해결했다고, 호텔도 무료 취소 되고, 신칸센도 일정 변경을 할 수 있으니까 다 낫고 나서 기분 좋게 여행을 가면 된다고 말했다. 자기 때문에 가족 여행을 못 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던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웃는 아이에게 얼른 약 먹고 낫자,라고 말을 했는데.
아이가 토해 버렸다. 아침에 먹은 음식물들이 역으로 솟구쳤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물만 마셔도 아이가 토했다. 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집에 있는 종합감기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일, 예상하지 못한 병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전에 내가 갔던 이비인후과가 떠올랐다. 아이도 목이 가장 아프다고 하니까, 이비인후과가 맞는 것 같았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가장 빠른 시간대로 예약을 하려는데 이런 문구가 보였다.
<발열이 있는 분은 인터넷 예약이 불가능합니다. 우선은 ‘발열 외래 희망’이라고 전화해 주세요. 증상을 확인한 후, 인터넷 예약과는 다른 예악 시간을 조정해 드립니다. 인터넷 예약하신 분은 취소를 부탁드립니다.>
아, 나는 울고만 싶었다. 전화 통화는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거였다. 일본어가 서툴러도 대면은 어떻게 하겠는데, 상대방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통화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를 무조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정말인지 속이 바삭바삭 타면서 울고만 싶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보호자라니. 애가 아파서 저렇게 누워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병원에 못 가다니. 스스로가 그렇게나 한심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말하니 남편도 전화 예약은 자신이 없다면서, 일본어를 잘하시는 다른 분께 부탁을 하자고 했다.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염치가 무슨 수냐. 민폐임을 알지만 그분께 부탁하자. 다행히도 남편의 지인 분께서 바로 전화를 해 주셨다. 4시 30분까지 무조건 병원에 도착하라고 연락이 왔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1km 남짓이었다. 평소에는 걸어 다니는 길이지만 오늘은 역부족이었다. 우버 택시를 불렀다. 1km 되는 거리가 1200엔이 나왔다.(진짜 일본 택시 요금 비싸다.) 그래도 병원에 빨리 가는 게 우선이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우리를 안쪽 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아무래도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로 발열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문진표를 작성하고, 열을 재고, 구두로 간호사님과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난번과 동일하게 번역기를 들고 함께 해 주셨다.(진짜 감사합니다.)
차례가 되어 아이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코와 목과 귀를 진찰했다. 그리고는 바이러스 검사를 하자고 하셨다. 나도 코로나 바이러스나 독감 검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긴 면봉으로 아이 입 안을 빠르게 훑었다. 웩. 아이가 헛구역질을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다시 기다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잠시 후, 방 안으로 의사 선생님께서 키트 두 개가 든 쟁반을 들고 오셨다. 영어가 가능하냐고 물으셔서 가능하다고 하니까 번역기 없이 설명해 주셨다.
“코로나 바이러스 엔드 인플레엔자 이즈 네거티브. 벋…”
하고 다음 키트를 보여주시는데 두 줄이다!
“요렌킹…”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요렌킹이 뭐냔 말이냐.
내 표정을 보시고는 여러 번 설명해 주시다가 결국 파파고를 드셨는데, 이번에도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이런 경우 일본어를 못 하는 스스로를 또 자책하게 된다) 결국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 게 ‘세균감염’이란다. 그래서 열이 나고 아팠다고.
세균감염이라니... 어디서 옮은 건지. 학교와 집 밖에 안 다니는 아이인데. 의사 선생님은 항생제를 포함한 약을 10일 정도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서 집에 왔다.(오는 길도 1km 남짓한 거리가 택시비 12000원이 나왔다.)
요렌킹이 뭔지 몰라서 이리저리 검색한 결과 ‘성홍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린이들이 걸리는 호흡기성 전염병인데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이후로 다시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초등학생들이 걸린다고 말이다. 요렌킹이라고 말할 때는 그저 그런 세균성 감기 같았는데, 성홍열이라고 말하니 큰 병 같았다. 법정전염병이란 무시무시한 말도 붙어 있고 말이다.
다행히도 항생제를 먹고 나니 열이 빠르게 떨어졌다. 이렇게 약 효과가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상 체온으로 회복한 이후에는 다시 오르지 않았다. 나는 혼잣말처럼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아이는 요렌킹에 걸렸지만 빨리 나았다. 물론 10일 동안 약을 써야 재발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그 이후에도 약은 꾸준히 먹었다.
이렇게 또 한 번 병원행을 경험했다. 내가 아픈 것보다 더 힘이 들고 속이 상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겨냈다. 진짜 지구촌 한 가족이다. 아, 어린이 의료보험 때문에 병원비 500엔만 내면 약값까지 전부 해결되었다. 외국인도 국가의료보험에 가입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려고 또 아프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