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책을 읽은 날

by sunzero

일의 발단은 이러했다.


9월, 새 학년 신학기(국제학교는 가을학기에 진학을 한다.)를 맞아 교사-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일 년 동안의 학급운영과 교과과정에 대해 듣고, 아이가 생활할 교실을 둘러보는 자리였다. 우리는 지난봄, 학기 중간에 전학을 와서 이런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좋은 기회이다 싶어서 그날만큼은 나도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학교로 갔다.

작은 교실에 둥근 테이블이 너덧 개 있고, 벽에는 아이들이 그려놓은 다양한 그림과 글들이 붙어 있었다. 아이 자리를 확인하고, 사물함도 열어보고(신학기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더러울 수가!), 칠판에 붙은 시간표도 구경했다.


잠시 후, 작은 체구의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자기소개를 하시고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하게, 학부모 자기소개를 하자고 하셨다. 간단하게 아이 이름과 내 이름만 말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언제부터 후쿠오카에서 살았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서 반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학부모의 취미와 특기에 대해, 학급 운영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나 봉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셨다.

아뿔싸! 예상 못한 자기소개 시간도 힘이 드는데, 학급에 도움이 될 능력을 말하라니.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인자한 웃음 뒤에 저렇게 사악한 내용을 말씀하실 줄이야. 그것도 영어로 모든 내용을 말해야 하는데. 아하하하.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는 중에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먼저 호주에서 왔다는 G어머니가 손을 들고 이야기하셨다. 유창한 영어로 이름과 국적을 말하더니, 자신은 요리를 잘해서 쿠키 교실을 할 수 있다 하셨다. 나는 한쪽으론 G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한쪽으론 내가 할 말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나도 쿠키는 만들 수 있는데. 같은 걸 말할까? 그럼 중복돼서 안 되려나. 그 사이 소개는 일본인인 A어머니에게 넘어갔다. 전공이 미술이어서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를 같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 나도 그림은 그릴 수 있는데, 전공자 앞에선 힘들겠네. 이 생각 저 생각하는 사이에 학급의 절반이 자기소개를 끝냈다.

나는 이쯤에서 적당히 자기소개를 하고 끝내고 싶었다.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나온다는데, 피날레를 장식하는 주인공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슬며시 손을 들었다. 파랗고 검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되었다.(아아, 집중받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눈들을 애써 외면하고는 담임 선생님만 바라보며 말했다. 하이, 아임 선땡땡, 아임 준쓰 맘. 앤드 위 리브드 인 블라블라. … 저는 한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고, 한국 문화에 대해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땡큐. 뭐 대충 이런 말을 했다. 임기응변으로 잘 넘겼다고 생각하고는, 이불킥 할 자기소개 시간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그렇게 교사-학부모 모임이 끝났는데, 느닷없이 추석 일주일을 앞둔 화요일에 담임선생님이 메시지를 보내셨다.

<안녕하세요, 준 어머님. 다음 주가 한국의 명절, 추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반 친구들에게 그날, 한국 그림책을 읽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윽,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임기응변으로 넘겼다고 한 그 말을, 선생님께서 바로 낚아채실 줄이야!! 메시지를 받고 망부석처럼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이 있으니 못 한다고 하기도 어렵고. 그래, 이 기회에 교실 구경도 한 번 더 하자. 하자. 하자.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추석과 어울리는 한글 그림책을 어디서 구하냐는 거였다. 한국에 있으면 집에 있는 책 중에서 고르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하루배송 신청을 하면 해결되는 일인데, 이곳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알라딘 해외배송으로 책을 주문했다.(해외배송 진짜 너무 비쌌다.)

고심 끝에 내가 고른 책은 이억배 작가님의 <솔이의 추석 이야기>와 백희나 작가님의 <구름빵>이었다. 이억배 작가님의 책은 (한글을 모르는 외국 어린이들이) 그림만 보아도 한국 추석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구름빵>은 영어로 번역된 책도 있어서, 한국어 책과 영어 책 두 권을 샀다. 선생님께 연락해서 한국어 책은 내가, 영어로 된 책은 선생님께서 번갈아 가며 읽으면 어떠하겠냐고 문의드렸다.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책도 선정하고, 배송 신청도 했는데. 음, 다시 걱정이 되는 건 추석날까지 책이 배송되겠냐 는 거였다. 화요일 오전에 나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그 전날인 월요일이 일본의 공휴일인 ‘경로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토일월, 3일간의 연휴가 발목을 잡았다. 화요일에 주문한 책이 금요일까지 올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책을 찾아 나섰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들러서 그림책 코너를 샅샅이 뒤졌다. 일본어로 쓰인 그림책들 사이에서 ‘다문화 코너’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한국 그림책 몇 권을 발견했다. 유레카!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없지만 보림 출판사에서 나온 <오늘은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이 있었다. 이수지, 백희나, 윤정주 작가님의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그림책도 있었다. 익숙한 표지를 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쓴 책이 아님에도 한국 작가들의 책을 일본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어깨가 으쓱여졌다.

내친김에 도서관 대출증까지 만들어 한국어로 쓰인 책 몇 권을 빌려왔다. 금요일까지 책이 배송되지 않으면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다행히 책은 예정된 날짜인 금요일에 배송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화요일 오전, 한국 작가들의 그림책을 들고 국제학교로 갔다. 그다음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시간을 보냈다. 영어 울렁증이 그 시간만큼은 사라져서 나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고, 아이들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두 눈을 빛내면서 그림책에 빠져드는 아이들 덕분에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에서 가족들이 차례를 지내는 장면에선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고, <구름빵>을 읽는 와중에는 허공에 손을 뻗어서 구름을 뜯어먹는 흉내를 내는 아이도 있었다. 한 친구는 아빠가 구름빵을 먹고 하늘을 나는 장면을 보면서 ‘에어플레인 브래드’라고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아이들이 깔깔 대고 웃었다. 좋은 그림책은 국적이나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의 마음을 흔드는 게 분명했다.

약속한 시간이 끝이 났다. 선생님께선 좋은 시간이었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와 달라고 하셨다. 나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진심으로 그런 말이 나왔다. 한국에는 정말 좋은 작가들이 많고, 그들이 쓴 훌륭한 그림책과 (줄글) 책들이 많으니까. 내가 할 수 있다면 이 학교의 많은 학생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어깨뿜뿜 하면서 한국의 책들을 마음껏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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