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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20. 2018

모두가 알면서도 책을 못읽는 이유

우리는 언제까지 목차에서 멈춰있을 것인가

  

멍뭉이도 읽는데...
  어떻게 하면 나도 독서란것에 취미를 붙여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때 많은 사람들이 본인 자신은 독서에 취미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물론 독서란것이 어느정도 앉아서 읽는 꾸준하고 질긴 엉덩이가 필요하면 더욱 도움이 되는것은 맞지만 그것이 필수라고 말하기에는 '글쎄?'. 애초에 나는 그렇게 꾸준히 앉아서 읽어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책은 진득하게 주말에 시간을 내서 카페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창가가 보이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한켠이 답답해질때가 있다.


  필자 본인도 책과 그렇게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다. 인생에서 부모에게 대못을 박는 다는 일인 삼수까지 한 나에겐 책이란것은 사치였으며, 제일 그나마 가까운 책들은 역시 '수험서', '자기계발서'의 수준 정도였다.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는다는것은 정말 할짓없는 사람들이나 읽고,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었으며, 대학 입학이후에는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인문학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전공책과 수험서들을 뒤적이는것이 나의 '독서'라면 '독서'였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후대까지 내려오는 이유에는 분명 그 차별적인 콘텐츠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때, 덜컥 나는 충동적으로 모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세트를 구입하고 난 이후였다. 300권이 넘는 책들이 어느날 집으로 배송되었고, 모두 정리하고 나니 나는 분명 미쳤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그때 이 책들이 훌륭한 인테리어 제품으로 쓰이다가 말겠구나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그 확신은 사실이 되어 화려한 300권의 전집은 2년동안 톡톡히 집안의 훌륭한 인테리어의 역할을 감당해 냈다.


  다시한번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무렵, 집 한켠의 이제는 시들어버린 인테리어 도구 '세계문학전집' 이 생각이 났다. 무조건 이번에는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 권을 무조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직장 출퇴근 할때도, 근무시간 짬짬히 휴식이 있을때도, 여가시간에도 읽든 안 읽든 간에 책을 무조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만 했다. (하필 첫 책이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초장부터 엄청난 굵기의 책을 골랐으니 볼때마다 그 책은 볼때마다 부담이었다.) 그렇게 부적을 가지고 다니다가, 점점 심심하니 한장, 두장씩 넘겨 보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내렸을때 애매하게 스토리가 끊기면 그것만큼 안달나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는 걸어다니면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이번 년도 초부터 시작했던 독서는 벌써 50권이 넘어가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책을 읽을 수 있음에도 '못' 읽는, 아니 '안' 읽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글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약점을 몇가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정확히 우리집에서도 책들은 이런 인테리어 역할이었다.

제발 출퇴근 시간에 스마트폰을 손에서 멀리하자.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하소연 하다시피 나에게 이야기 할때가 많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을 쭉 관찰해보면 틈틈히 나는 시간마다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업무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퇴근해서도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는것은 문제가 된다. 스마트폰이 독서에 가장 큰 적임을 알고서도 스마트폰을 나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것은 독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렇다면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말라는 소리인가? 이런 비현실적인 말이 어딨나?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사실 아에 안들고 다니면 가장 좋지만, 나도 안다. 그게 불가능 하다는거. 나도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핸드폰이 없으면 너무나 많은 불편함을 초래한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출퇴근 시간에 핸드폰을 가방속에는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핸드폰 대신에 책을 꺼내 볼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출퇴근 시간 지하철을 타보면 한 칸에 8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자신의 시각을 상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15%정도는 못다한 취침을 즐기시는 경우고, 간간히 책을 읽는 사람이 5%정도 되는것 같다. 본인의 경험에 한정되어 이야기 하는 작은 소견이지만, 출퇴근 시간에 앉아서 보는 독서량은 어마무시하다. 가장 최근에 본 「오셀로」같은 경우에는 출근 시간 20분 기준 많으면 15페이지 정도 보았던 것 같다. 이 책이 총 243페이지 정도 되니 16일 정도면 충분히 한권을 볼 수 있다. 16일이나 걸려서 200페이지 남짓하는 책을 겨우 한권 보는것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지금 말하고 있는것은 '출퇴근 시간 한정' 독서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더 본다면 이 시간은 하루만에 끝날 수도 있다. (실제로 「맥베스」같은 경우는 출근할때 집어서 나왔는데 그날 저녁에 모두 다 봤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것은 몇 권의 책을 더 빨리 보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허하게 봤던 뉴스를 두번 클릭해서 보는 시간이나, 전혀 이름도 알지 못했던 연예인의 결혼기사를 보는 시간을 아껴 흘러가는 나의 시간을 집중시켜 한 권이라도 더 독서하자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인지해주셨으면 한다.


무조건 책을 들고다니자


  많은 사람들이 책은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편안한 시간, 편안한 분위기에서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이건 매우 심각한 고정관념이다. 이제부터는 조금 생각을 바꾸었으면 한다. 책은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는것! 이라고. 이게 뭐 별거냐 싶겠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생각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책은 읽어야 하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카페, 도서관 … 아주 조용하고 집중력이 강화되는 장소에서 책을 읽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장소에 얼마나 가는지를 숙고해보면 이러한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독서를 방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애초에 주말에 일어나서 도서관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날이 엄청나게 더워서 집에서 에어컨을 키기가 부담스러운 전기세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주말아침을 느긋하게 일어나 즐기고, 평일에 잡지못한 약속들을 잡느라 바쁜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해야하는 일이니, 책 읽을 시간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책을 어떤 상황이든지, 어딜 가던지 들고다닌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앞서 이야기한 예시를 좀 활용해보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리는 간단한 가방에 여자라면 파우치가 추가되겠고, 지갑 정도를 챙겨가는것이 일반적이다. 엄청나게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약속장소에 10분전에 도착하는것이 예의이기 때문에 장소에 일찍 도착하면 할게 없다. 그래서 핸드폰을 붙잡고 친구를 들볶기 시작한다.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끊임없이 재촉하고,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친구들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책을 들고 다닌다면 우리는 그 기다리는 10분을 매우 알차게 쓸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아무것도 안할때는 친구가 정말 지독하게 안오고 늦게 오는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그 순간 부터는 친구가 엄청나게 빨리온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책 한권으로 친구간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지는 경우를 맛볼 수 있다. (물론 경험에 기반한 헛소리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앞선 예시를 사용했지만, 우리가 정말로 책을 들고다닐 경우에 우리는 한페이지라도 더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한권을 다 읽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깊게 묵상하며 책을 보고 싶다라는 분들이 계실 수 있지만, 그 책속에 빠져든다면, 어디에서든지 책을 읽을때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시끄러운 주변의 환경에 눈을 돌리더라도, 그래도 책을 핀 순간 책을 읽게되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것에 약점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해 드리는 마지막 방법이 있다.


글을 쓰자.


  정말 중요한 방법이다. 생뚱맞게 글을 쓰라고 하는것 같아 당황스러운것, 필자도 안다. 그리고 여러분 대부분 시간도 없고, 글도 못쓴다고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몰라서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짧은 글이라도 글을 쓰자. 글을 쓸때, 우리는 절대 대충 쓰지 않는다. 물론 개인 다이어리에 나의 서평을 쓰는것도 좋지만 블로그나 브런치 등 공개적으로 남에게 글을 보이는 장소에 글을 쓰게 된다면, 이상하게 내 글을 한번 보고, 두번 보게 되고, 쉴새 없이 읽어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책을 잘 읽은 것이 맞나, 남들과 비교도 해보고, 이상한 논리 구조에 대해서 고찰해보기도 하고, 내가 인상깊었던 부분을 여러번 읽게 됨으로서 머릿속에도 정말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글쓰는 실력도 정말 눈에 띄게 향상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필자도 처음 쓴 글인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글을 지금 읽어보면 너무나도 손발이 오글거리면서, 소제목을 왜 이태릭체로 눕혀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후회가 몰려온다. 하지만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서 더 좋은 글에 대한 고찰과 숙고로 이어지고, 글의 구성과 논리가 탄탄해지며, 이전 작품과 현재의 작품이 이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의 닮은 점을 비교한다던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서술하게 된다던지, 좀 더 풍부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책을 읽고 '재밌었다~'라고 끝난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3-4시간동안 나의 글에 대해서 고민하여 나온 결과물들의 축적이기 때문에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런 도서관에서 있어야지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제발 버리자.

나는 책을 못읽는것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나는 책을 못읽는 것이 아니다. '안'읽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작은 부분만 고쳐도 책은 나의 손에 금방 들어올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세계문학 고전을 처음 읽었을때,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완독했을때, 그 짜릿함과 닭살돋았던 경험들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나의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작품들을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사회의 모습, 우리의 공허한 모습들을 직면할때마다, 삶에 대한 상고(相考)함이 성숙해짐을 느낀다. 어렵지 않다. 여러분들도 이 세계를 마음껏 즐기길 원한다. 지금 당장 여러분들의 방에 인테리어 역할로 사 놓은 책들을 집어들자. 그리고 읽기 시작하자. 힘들다면 접어두어도 된다. 내일 또 읽자. 움직이면서도 또 읽자.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내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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