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년 8월 18일의 도전

by 그레곰


프랑스 체류증을 받기까지
드디어 내 프랑스 체류증을 갱신받았다. '드디어'라는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3개월 기다림 끝에 받은 귀한 체류증이다. 벌써 프랑스에 산지 3년 차, 체류증도 세 번째 갱신이지만 프랑스에서 기다림은 아직도 쉽지 않다. 서류를 준비하고 제출하는데도 어림잡아 한 달이 걸리고 경시청에서 무사히 서류가 통과하면 체류증이 나오기까지 3개월 이상 걸린다.


첫 해에 첫 체류증을 갱신할 땐 어떻게 갱신하는지 몰라서 많이 헤맸었다. 인터넷에 검색도 많이 해보고 프랑스에서 여러 해 동안 산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서류를 제출하러 경시청에 갈 땐 프랑스 친구들에게 같이 가달라고 도움도 요청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서류엔 문제가 있었고 결국 집으로 되돌아왔다. 내 손에 반송된 서류 봉투가 잡힌 순간 화가 매우 났었다. 스스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책과 함께 프랑스의 복잡한 사회를 향한 분노였다. 그러나 내 분노를 겉으로 드러 낼 수는 없었다. 내 체류증이 흔치 않은 유형이기 때문에 충분히 내 서류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인은 프랑스에서 세 가지 유형의 체류증을 받는다. 장기 유학이나 교환 학생으로 왔다면 학생 비자, 일하러 왔다면 취업 비자, 마지막으로 내가 갖고 있는 방문자(Visiteur) 비자다. 방문자 비자도 여러 유형으로 또 나눠지는데, 나는 종교 초청 방문자 비자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나를 초청해서 프랑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내 비자 유형이 흔치 않다는 건,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 요청을 했을 때 알게 되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6개월 전, 긴장된 마음으로 대사관에 방문했었다. 워낙 대사관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화도 잘 내고 까다롭다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도 역시나 대사관 내의 공기는 무거웠고, 직원은 나에게 말을 쏘와 대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었다.


"프랑스에 왜 가려고 해요?"
"종교 방문자 비자는 자주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받아서 가는 거예요?"
"서류가 잘 못 되거나 비자 거부를 당해도 저희 대사관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무서운 말이었다. 프랑스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두 내 책임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다행히 나는 한 달 뒤에 프랑스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나의 첫 체류증 연장 서류는 문제가 되어 내 손에 돌아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준비했고 5개월 만에 체류증을 갱신할 수 있었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세 번째 체류증을 들고 나를 후원해주는 가톨릭 기관의 책임자를 만나러 갔다. 매년 그랬듯이 체류증 사본을 기관 사무실에 보관하기 위해서다. 나는 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첫해보단 더 쉽게 더 빠르게 받은 체류증을 자랑하듯 꺼내 들었다.


"봉쥬! 이것 봐, 드디어 세 번째 체류증이야!"


순간 2년 전에 프랑스에 처음 발을 딛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빛보다 빠른 속도로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고 지나갔다. 내 앞에 앉아 있었던 후원 기관의 책임자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위로해주듯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벌써 세 번째야? 시간 참 빠르다.
이제 1년마다 체류증을 갱신해야 할 일은 몇 년 남지 않았을걸.
너가 5년 차가 되는 때부턴 10년짜리 장기 체류증이 나올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마냥 기쁘기보다 내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저 나에게 언제 5년 차가 다가 올 지 막막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난 시간들이 빛보다 빠르게 지나갔는데, 앞으로 올 시간들은 너무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이 쉽지 않았기에 미래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장된 체류증을 받은 날, 이렇게 나는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서 있었다.


새로운 체류증엔 새로운 사진과 함께 언제나 8월 18일이 찍혀있었다. 8월 18일. 한국을 떠난 날짜이자 프랑스에 도착한 날짜다. 한국을 떠날 때 슬펐던 기억과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기대감에 가득 찼던 날짜다. 또 체류증을 갱신해야 하기에 또다시 서류와 전쟁을 해야 하는 날짜다. 무엇보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시간을 받아들이기 딱 좋은 날짜다. 그래서 나는 8월 18일을 좋아하기로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