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때 한국에 가면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왜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많은 도시들 중에 왜 엑상프로방스에서 살고 있는지 등이다. 대학교 좋은 성적으로 나와서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고 한창 사회에 잘 자리 잡을 때 프랑스로 떠난 내가 이해가 잘 안됐나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왜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모든 게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온 이유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 3년마다 열리는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는 언제나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대회에 참석하는 백 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온다. '미래에 나는 뭐하지?' 라는 것과 같이 20-30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고민 말이다. 1주일 동안 우리는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공감하고 울고 웃으며 희망을 안고 자기 나라에 돌아간다. 내가 처음 이 대회에 참석했을 때 어떤 분이 그랬다.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땐 새로운 기분과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꺼라고. 내가 프랑스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세계청년대회 때문이다.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2016년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세계청년대회가 열렸다.
2016년 7월, 폴란드 크라코프(Krakow)에서 제31회 세계청년대회가 열렸다. 그곳은 세계청년대회를 만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고향이었고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널리 퍼트리게 된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가 수도생활을 했던 곳이다. 나는 이 특별한 장소에서 미디어팀 봉사자로 참여했었다. 방송국에서 일한 경험을 되살려 크라코프 곳곳을 누비며 취재했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대회의 마지막 날, 현지인까지 포함해서 약 200만명이 모인 폐막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땡볕 더위에 한복을 입고 혼자 춤을 추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한국말로 내 이름을 불렀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온 한국 신부님이었다. 그분은 내가 어릴 때 내 미래를 터놓고 고민을 했던 신부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겨서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신부님이기도 했다. 나는 오랜 만에 만난 신부님께 내가 살아온 얘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등 젊은이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신부님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그리고 기도해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다시 뛰는 내 심장
세계청년대회 행사가 끝난 그해 가을, 한국에서는 병인박해 1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조선 말기,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천주교 박해로 병인년(1866년)에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큰 행사였다. 가장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죽은 병인박해는 프랑스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도 여러 성직자와 신자들이 순례단을 꾸려 한국에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었다. 공교롭게도 이 순례단에 크라코프에서 만난 신부님도 함께 하고 있었고 우리는 서울 새남터 성지에서 다시 만났다.
신부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헤어진 다음에 나는 너를 계속 생각했어. 나는 너를 프랑스로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갑자기' 들은 말이었다. 물론 대학생 때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는 종교학을 공부했기에 학비가 싼 독일이나 신학의 중심인 로마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아무리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지출되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프랑스 신부님의 제안은 솔깃했다. 신부님은, "모든 비용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에서 대줄 것이니 어학을 공부하면서 일단 살아보라"라고 했다. 하지만 급작스런 제안에 흔쾌히 "네"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감사하는 인사와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곧 프랑스로 떠납니다. 저를 돌이켜보니 여러분께 참 많은 사람을 받았다는 생각뿐입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한국을 떠나면서 SNS에 남긴 글
몇 개 월 뒤, 추운 겨울이 지날 즈음 한 통의 편지가 나에게 도착했다. 프랑스에서 온 편지였다. 나는 번역기를 동원하여 그 편지를 차근히 읽어봤다. 한 단어,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서 나를 초대하겠다는 공문이었다. 프랑스에 가겠다는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황에서 온 편지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내 마음이 팔딱팔딱 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나는 그 설렘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내 열정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6개월 뒤, 한국을 떠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