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도시인가?
내가 살고 있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 가까이에 있는 도시다. 흔히 도시라고 하면 빌딩이 메타세쿼이아 나무 숲처럼 쭉쭉 뻗어있고 큰 거리와 자동차가 쌩쌩 다니는 걸 연상한다. 하지만 엑상프로방스에선 높은 빌딩을 찾아보기 힘들고 큰 거리도 없으며 자동차는 매우 느리게 다닌다. 그래도 2천 년 가까이 남프랑스의 중심 역할을 해온 도시인 것은 확실하다.
엑상 프로방스의 프로방스는 이름 그대로 라틴어 프로빈시아(Provincia)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로마 시대 행정 구역 중 하나로서 총독이 황제를 대신해 다스리는 속주였다. 그중 엑스(Aix)라고 부르는 이곳은 프로방스에서도 가장 중심지였다. 지금도 엑상프로방스를 중심으로 자동차로 30분~40분이면 바다와 맞닿아있는 마르세유(Marsille, 사실 정확한 이름은 '막세이'다), 교황들의 유배지였던 아비뇽(Avignon), 고흐의 도시 아를(Arles)에 갈 수 있다.
17세기의 엑상프로방스 모습 어느 날 한국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가까운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 엑상프로방스에 산다고 했지? 무슨 뜻이야? 엑상... 액상 수프가 많이 있나?"
난 재빨리 두 눈을 돌려 친구의 시선을 피했다. 당치도 않는 농담이었다. '액상 수프가 가득 담아있는 라면이나 나에게 보내주고 그런 말이나 하지!'라는 말이 내 턱 밑까지 왔다가 내려갔다. 내 친구도 본인의 농담이 얼마나 썰렁한 농담인지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헤헤헤' 웃고 넘겨버렸다.
그런데 며칠 후 내가 다른 친구에게 엑상 프로방스를 소개할 때, 나도 모르게 '액상 수프' 얘기를 꺼내 들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엑상프로방스를 표현하는데 액상 수프가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엑상 프로방스의 첫 글자 엑스(Aix)는 라틴어로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이 동네 이름을 굳이 풀이하자면 '물의 도시', '프로방스의 물'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로마 제국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섹스티우스(Gaius Sextius Calvinus)가 이곳 지하수를 발견해 도시를 설립한 게 엑상프로방스의 시작이다. 그래서 물과 이 도시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시내 곳곳엔 크고 작은 분수가 백 개 이상 위치해 있다. 도시 입구에 있는 호똥드 분수(la Rotonde)부터 이름 그대로 이끼가 가득 껴있는 이끼 분수(Fontaine Moussue)까지 절대 똑같지 않은 분수가 남프랑스의 강한 햇빛을 막아주고 있다. 그리고 매일 이른 아침, 청소부가 소화관에 호수를 꽂아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 도시 곳곳을 청소하는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다. 무엇보다 로제 와인의 중심지가 바로 엑상프로방스다. 보기만 해도 싱그럽게 만드는 분홍색을 간직한 로제 와인은 깨끗한 물로 만들어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북쪽엔 산에서 물이 내려오고 남쪽엔 지중해가 있으니 로제 와인을 생산하기에 제 격이 아닐 수 없다.
마르세유에서 본 지중해 / 니스에서 본 지중해 / 생트 크와 호수로 흘러가는 베흐동 협곡의 계곡물
아낌없이 내어주는 지중해
앞 뒤로 물이 많이 존재하는 탓에 여름이면 수영하느라 정신없다. 버스타고 남쪽으로 30분만 가면 마르세유라는 바닷가 도시에 도착할 수 있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라서 연중 따뜻하고 햇빛에 비친 바닷물이 출렁이며 사람들은 서핑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치 영화 맘마미아에 배경이 현실로 나타나는 듯 하다. 나도 영화 주인공인으로 착각하며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르고 바닷물에 폴짝 뛰어든다. 가끔은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도 관광객으로 수영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니스에 간다. 차를 타고 1시간이면 도착하는 니스는 또 다른 지중해의 매력을 보여준다. 이온음료처럼 청량한 푸른색의 바닷물이 나를 반겨준다. 아마도 하느님이 다양한 푸른색 물감을 지중해 곳곳에 뿌려놓았나보다. 짠 바닷물로 온 몸이 절여져서 지칠 때는 엑상프로방스 북쪽에 있는 생트 크와 호수에 간다. 차를 타고 40분만 달리면 된다. 옥색의 호숫물이 산 골자기 사이로 흐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작은 배를 가지고 와서 풍류를 즐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 얘기한다. 지중해가 앞 마당이고 생트크와 호수가 뒷마당이라고.
가장 완벽한 구경
내가 이곳에 살면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 호똥드 분수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엑상 프로방스의 시작점에 위치해 있고 가장 큰 분수다. 분수 곳곳엔 천사와 돌고래, 사자 등 다양한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힘차게 내뿜어지는 물과 함께 잘 어울려져 마치 움직이는 듯하다. 또한 이곳엔 다양한 사람들이 쉬다 가는 곳이다. 젊은이들이 피자를 펼쳐서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기도 하고 어르신들은 힘든 발걸음에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한다. 또 지나가던 연인들은 여기에 앉아 마치 한 몸이 된 듯 서로에 기대며 사랑을 속삭인다.
사람 구경에 지칠 때 즈음, 분수 위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내 마음이 뻥 뚫린다. 시시 각각으로 색깔이 바뀌는 하늘만 바라봐도 재미가 쏠쏠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지중해 바다를 연상시키고 해질녘 붉은 하늘은 달콤 짭짤한 빨간 토마토 수프가 생각나게 한다. 종종 노을빛이 분홍색으로 펼쳐질 때가 있는데 누가 하늘에 비싼 수채화 물감을 쫙 뿌려놨는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욕심쟁이처럼 나 혼자서 보고 싶지만 내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하늘과 사람 등을 구경하고 있다. 프랑스 만의 여유인 셈이다. 어느새 나도 프랑스 사람들과 동화되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한국에서 바쁘게 살았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3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름 쉬면서 일 했는데도 정작 내 마음엔 여유가 없었던 그 시간들 말이다. 쉬는 날에도 미래엔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뿐이었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나였다. 그런데 프랑스에 살면서는 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히 내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중하지 않으면 내 미래는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에서든지 물은 정화의 의미를 갖고 있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어쩌면 호똥트 분수 주변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걱정을 물로 씻어내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분수 주변에 앉아있다가 먼지 묻은 바지를 탁탁 털어 내고 나면 프랑스에서 홀로 살아가는 힘듦과 걱정도 털어지는 듯하다. 더불어 집에 가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진다. 내일을 다시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힘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