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몇 년 살았으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한국인이 몇 명 없는 동네에서 하루 종일 프랑스어로만 대화를 하다 보니 문장 구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정도는 됐다. 문제는 단어다. 같은 뜻이라도조금씩 의미가 다른 단어가 너무 많다. 한국어에도 이런 단어가 많다. 예를 들어 파란색이 푸른색, 퍼런색, 시퍼런 색 등으로 조금씩 의미가 다르게 나눠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어에 관심이 많은 친구의 지극히 개인적인 설명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에 각 가문 별로 특별한 단어가 필요했는데 너무 많은 단어를 만들어내다 보니 지금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프랑스어는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국제 언어로 성장했고 현재 유명한 국제기구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UN에서는 영어와 함께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올림픽 장내 방송에서도 프랑스어가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잘 아는 국제축구연맹 피파(FIFA)의 약자가 바로 프랑스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프랑스어는 매우 어려운 언어다. 자기네 언어가 최악의 언어라는 걸 쉽게 인정한다. 현지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언어는 듣는 대로 써지지 않고 말하는 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발음을 정확히 하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기 힘들다. 대화 도중에 상대방에게 다시 물어보고 사전을 찾아보는 건 기본이다. 심지어 소수의 프랑스 사람들은 주어에 따라 바뀌는 동사 변형 책을 갖고 다니기도 한다.
피하고자 했던 프랑스어
외국인인 나에게 프랑스어는 어떤 언어일까? 알면 알 수록 알고 싶지 않은 언어다. 그러나 내가 살려면 알아야 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내가 프랑스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저는 프랑스어를 잘 못합니다. 매일 어렵고 힘들어요!" Je ne parle pas bien le français! c'est dur et toujour difficile!
프랑스 친구들은 나에게 '이미 잘하고 있다'라고 응원을 해주지만 여전히 말하는데 부족함을 느낀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밥 먹으면서 대화에 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프랑스는 보통 동그란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누구를 위한 상석이 없고 공평하게 대화를 나누려는 프랑스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이 식탁 위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한두 시간 사이에 몇십 개의 주제가 왔다 간다. 꼭 주제를 만들어서 대화하기보다는 아무 얘기나 꺼내서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식탁 위에서의 대화다. 그 안에서 나는 언제나 웃음과 이해가 한 박자 느리다. 오고 가는 대화를 먼저 내 머릿속에서 번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음식물을 씹고 있으면서 머리에서는 내가 배웠던 단어를 다시 기억해내야 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프랑스에서의 첫 몇 달은 체할까 봐 제대로 밥도 못 먹은 적도 있었다. 종종 내 주변에 착한 프랑스 친구가 앉는 날이면 프랑스어를 더 쉬운 프랑스어로 설명을 해주기도 하지만 나에게 밥 먹는 자리는 언제나 큰 스트레스였다.
프랑스어를 많이 듣고 많이 말하면 피곤하다. 매일 이렇게 쉬어야 다음을 듣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대화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대화는 무슨 대화야! 밥이나 먹자'하고 음식 맛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저 친구들이 웃으면 웃고 공감하면 공감하고 인상을 찌푸리면 나도 찌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친구가 나에게 '너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라고 갑자기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가짜로 대화에 끼고 있던걸 그 친구가 알고 있었던 게 매우 창피했다. 곧이어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너는 한국인이잖아. 우리에게 너는 외국인이야. 당연히 우리말을 이해 못하는 게 정상 아니겠어?"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날, 나는 프랑스어 알파벳과 자기소개 정도밖에 할 줄 몰랐던 나였다. 2년간 어학을 했지만 여전히 프랑스어를 어려워하는 나 자신이 매우 싫었다. 언제쯤 프랑스 친구들처럼 유창하게 말하고 비속어도 섞을 수 있을지 매일 부러워하기만 했다. 이 와중에 내 친구가 한 말은 매우 현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한국인이고 프랑스어는 외국어다. 내가 한국에서 첫 휴가를 보낼 때 수많은 한국어를 갑자기 이해할 수 있어서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간다고 황새가 될까. 친구의 말을 인정하는 순간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닫았던 내 귀를 열어야 했다.
진정한 언어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때, 어느 시골에 살고 계시는 가톨릭 주교님을 만났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로 한국에서 60년 넘게 살고 계신 분이다. 주교님이 나에게 하신 첫 당부는 바로 '언어'였다.
"저는 프랑스 사람이고 한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한국어를 90프로 밖에 못 알아들을 걸요? 언어는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너무 많아서 끝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60년 넘게 사신 분도 한국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신다니! 순간 실망한 마음이 나를 감쌌었다. 이윽고 주교님은 현지인 친구들을 많이 만들고 자주 만나라고도 말씀하셨다. 모르는 단어는 창피해하지 말고 계속 물어보는 게 다른 나라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라면서 말이다. 90세를 넘긴 할아버지 주교님도 지금까지 모르는 단어를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본다고 하는데 나라고 못할 수는 없었다.
주교님의 배웅을 받으며 그 집을 나올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도구일까? 만약 그렇다면 의사소통이 필요할 때만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우리나라 표현으로 바꿔 얘기하면 정情을 주고받는 것이다.
프랑스어 공부를 같이 했던 엑스마르세유 대학교 어학당 친구들
그렇다면 진정한 언어는 무엇일까? 프랑스에 살면서 어학 자격증 등급이 아무리 높아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반면에 프랑스어는 잘 못하지만 늘 프랑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언어교환으로 만난 프랑스 친구 때문에 한국에 돌아갈 날을 미룬 사람도 있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도구가 아닌 게 분명하다. 진정한 언어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다. 나도 프랑스에 살면서 여러 사람들과 하나의 끈으로 묶이려면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내 마음을 먼저 열면 내 귀도 열리게 되고 어느새 프랑스어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는 언어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쥬 넴므 빠 르 프랑세(Je n'aime pas le français), 나는 프랑스어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