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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May 25. 2020

나의 프랑스 탈출기

3월 초, 코로나가 프랑스에 막 퍼지고 있을 무렵, 나는 프랑스 서북쪽 브르타뉴(Bretagne)에 머물고 있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심포지엄과 세미나 그리고 피정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피정이라는 말 그대로, 세속의 삶을 떠나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학문적으로 주어지는 주제와 기도 생활에 더욱 정진하고 있었다. 숙소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평선이 사방팔방으로 보이고 널따란 초원에는 소와 양들이 떼로 풀을 뜯어먹으며 여유로운 풀밭 생활(?)을 보낼 뿐이었다. 


코로나, 프랑스에서의 시작

이처럼 고요한 브르타뉴의 한 시골을 시끄럽게 만든 건 '코로나 바이러스'였다. 브르타뉴의 중심 도시인 렌(Rennes)에서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파리에서도 몇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이 먼 곳까지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분명 프랑스 전역으로 퍼질 것은 당연해 보였다. 한국에서도 한 신천지 교인의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졌기 때문에 프랑스도 재빨리 대응하지 않으면 한국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프랑스 사람들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나는 단순하게 '역시 프랑스는 모든 일을 차분하고 신중하게 해결하려는구나!'라고 감탄을 했지만 이것은 단 일주일 만에 깨지고 말았다.


서프랑스 한 개신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개신교회는 자신이 원하는 교회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교회가 있다면 지역 구분 없이 예배에 참석한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예배를 마친 교인들은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졌고 결국 하루아침에 프랑스 전국이 감염 2단계(국내감염확대방지)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나는 안 걸리겠지, 설마 여기도 감염되겠어?', '정부가 너무 심각하게 대응하는 거 아니야?'라며 안일하게 대처하기만 했다. 심지어 프랑스 북서부 렁데르노(Landerneau)에선 스머프 축제를 개최했고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우린 스머프이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안 걸려!'라고 말했고, 프랑스 전역에 있는 술집과 유흥 시설에는 밤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한 마크롱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생방송


프랑스 정부는 3월 중순, 1주일 사이에 세 번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두 번은 대통령이 직접 생방송에서 연설했고 한 번은 총리가 발표했다. 단순하게 손을 깨끗하게 씻고 기침할 때 입을 잘 막으며 코로나 발생 지역 방문 금지만을 강조할 뿐이었다. 마스크 착용도 권하지 않았다(프랑스 정부는 4월 말이 되어서야 의무 착용을 선언했다).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 언론이었다. 집에서 손소독제를 만들면 폭발한다느니,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린이와 노인들에게만 걸리는 병이라는 등의 가짜 뉴스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점은 프랑스 사람들이 뉴스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점이다. 프랑스 사회는 우리나라보다 언론의 자유가 훨씬 낮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귀국 결정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프랑스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고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이 나라에 계속 머물고 있으면 나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설사 감염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인 내가, 프랑스인들과 동등하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비행기 표를 바로 샀다. 사실 귀국을 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 대통령의 첫 대국민 담화문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많은 대학교들이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귀국을 하겠다고 담당 교수님께 얘기를 하려는 순간 프랑스 정부에서 또 다른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모든 교육기관의 무기한 폐쇄 결정이었다. 이제는 강제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를 담당한 교수님은 나의 귀국 행을 말렸다. 온라인 수업을 하더라도 프랑스에 머물면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나는 즉각 프랑스인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얼마나 대처를 못하고 있는지 직설적으로 말했고 나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이에 돌아온 교수님의 대답은 황당했다. 프랑스가 한국보다 의료 수준이 좋고 마스크는 의무로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100인 이하의 집단은 모여도 괜찮다고 했으니 기숙사에서 집단으로 머물러도 아무런 피해가 없을 거라는 황당무계한 말이었다. 교수님이 나를 잡으면 잡을수록 나는 더더욱 귀국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은 결국 나를 결국 놓아주면서 딱 한 가지 당부했다. 프랑스어를 잊지 말아 달라고.


엑소더스(Exodus), 프랑스 탈출기

3월 17일. 나는 2주간의 브르타뉴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7시간이 넘는 기차 여정은 매우 지루했지만 나는 눈을 붙이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의 한국행 비행기표는 이틀 후 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에 나는 어떻게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나에게 한 개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틀 후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안내 문자였다. 정말 믿기 힘든 문자였지만 어느 정도 각오하고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바로 어제(16일) 마크롱 대통령의 2차 발표문이 매우 강도 높았었기 때문이다. 이미 프랑스 정부에서는 15일부로 모든 음식점과 유흥시설의 폐쇄를 명령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14일 자정이 될 때까지 마지막 밤을 즐겨야 한다며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이 유흥시설을 찾아 즐기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어제 마크롱 대통령은 한 숨을 여러 번 내쉬며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Nous sommes en guerre)."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들의 통행금지와 유럽 나라 간의 국경 폐쇄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 여정은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게 되어있었다. 영국은 쉥궨 협정 국가도 아니고 유럽연합(EU) 국가도 아니기 때문에 마크롱 대통령의 어제 결정은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고 결국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 취소 문자를 받게 된 것이다. 




다행히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만 취소되고 런던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는 열려있었다. 나는 당황한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내 생에 태어나서 이처럼 두뇌 회전을 빨리해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엑상 프로방스에 도착하자마자 1시간 만에 나와서 마르세유 공항으로 향했다. 일단 최대한 빨리 런던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나의 최종 결정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모든 비행기 항로가 닫힌 상태에서 유일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스페인을 거치거나 네덜란드를 거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스페인도 당일 자정에 국경을 닫겠다고 예고를 한 상태라서 나는 곧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하기로 했다. 


17일 밤 11시.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런던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서울에 가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히드로 공항 체크인 기계에 내 여권을 대는 순간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기에 이르렀다. 체크인이 안 되는 것이다. 공항 직원 설명에 따르면, 내가 프랑스에서 런던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여정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출발지에서 체크인을 하지 않으면 중간 경유지에서 체크인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뿔싸. 나의 모든 계획이 망가지고 말았다. 만약 런던에서 서울로 가지 못한다면 나는 졸지에 미아가 될 지경이었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히드로 공항의 야간 직원을 붙잡고 내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에 꼭 가야 한다고. 출발지에서 비행기를 못 탄 건 항공사의 잘못이니 이건 예외 상황이지 않겠냐고 말이다. 다행히 나랑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다소 격양된 어조로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짜증을 내며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아침에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면 문의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나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을 고안하지 않으면 안 됐다. 순간 영국 문화와 관련된 책에서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영국 사람들은 굉장히 예의 있고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아, 아까 내가 다른 사람들과 했던 행동은 분명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나는 공항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그 직원에 가서 차분하고도 최대한 예의 있게 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시간 동안 그 직원을 설득하면서 '미안하다(I'am sorry).'라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했었을 것이다. 다시 말을 걸어서 미안해요, 늦은 시간 미안해요, 내 영어가 짧아서 미안해요 등등. 그 직원은 결국 나에게 마음을 열어줬다. '지금은 너가 굉장히 힘든 상황인 걸 충분히 이해했고 이 자리에 혼자 있으니 해결을 해주겠다'는 거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 직원을 따라 직원 전용 컴퓨터 앞으로 향했고 단 5분 만에 런던-서울행 비행기에 체크인을 하고 표를 발급해줬다.


순간 내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수 시간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분노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다시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를 도와준 여러 사람들을 기억하며 고마운 마음을 여러 번 전했다.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당황한 나를 진정시켜준 친구들이 있었고, 나를 마르세유 공항까지 데려다준 또 다른 친구가 있었으며 지금 이곳에서 마음을 열고 한국으로 갈 수 있게 해 준 직원이 있었다.


아- 나의 조국, 나의 가나안 땅, 나의 서울!

3월 19일 아침, 11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는 여정에서 다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로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보통 같으면 비행기를 탑승할 때 내 여권과 티켓을 지상 직원에게 건네주고 확인하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펼쳐서 직원에게 보여주고 바코드에 직접 찍어서 탑승해야 했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비행기 내부에서도 승객들은 서로를 경계했다. 모든 승객,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마스크를 모두 착용했다. 사실 나는 마스크를 구할 수 없어서 스카프를 얼굴에 돌돌 말아 탑승했다. 마치 베두인(아랍 유목민) 같았다. 내 생각에 이 비행기에 탑승한 한국인 중 마스크가 없는 사람이 나뿐이었던 것 같았다. 다른 한국 사람들을 둘러보니 위생 모자를 착용한 사람, 고글을 낀 사람 심지어 방역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탑승한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에선 마스크 하나도 구하기 힘들었는데 그 사람은 방역복을 어떻게 구했는지 대단해 보였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마침 내가 도착한 날이 정부에서 코로나 방역 대책을 공항에서 처음 실시한 날이었다. 모든 입국자는 열을 재야 했고 자가격리 진단 어플을 의무로 설치해야 했다. 정상 체온(36.5) 보다 높으면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으러 분류가 되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열을 쟀고 다행히 나는 비발열자로 분류되어 바로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https://youtu.be/Uu2kP5_6ou0?t=59

안심된 마음으로 공항 밖에 나오자마자 연합뉴스 인터뷰를 했다.


공항 밖에 나와서 한국의 첫 바깥바람을 들이켠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 상쾌하다. 1박 2일간의 긴 여정 안에서 쌓인 여러 감정들이 한 방에 씻어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수십 번의 비행기를 타고 여러 공항에 들어가고 나왔지만 이처럼 기분 좋은 도착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보다 더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이번 여정은 내가 절대 잊지 못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좋아서? 안 좋아서? 슬퍼서? 착잡해서도 아니다. 단 한 가지의 기분으로 설명하기엔 힘이 들다. 아마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이 들었고 어떤 생각으로 프랑스를 빠져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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