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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Sep 08. 2022

프랑스의 상징,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1

  만약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을 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유럽 건축의 꽃을 피운 고딕 양식의 표본이자 끝판왕이죠. 상상을 해보세요, 성당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뾰족탑은 하늘 높이 떠있는 구름마저 뚫을 것 같이 우뚝 솟아있고 성당 정면에 있는 두 개의 탑은 누구나 성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완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실내는 어떤가요, 이 성당에는 아주 특별한 빛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장미 창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유리를 통과한 빛은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개인적으론 제가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에 처음 방문했을 때가 2014년 여름이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50일간 유럽 배낭여행을 했을 때인데, 제 여행의 첫 시작점이 바로 파리였지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성당 이야기도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정확히 알면  이해하기 쉬운 성당


  그런데 먼저 이 성당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야겠네요. 흔히 우리는 ‘노트르담 대성당’ 혹은 ‘노트르담 드 파리’라고 부르죠. 이게 다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노트르담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Notre 여인 Dame, 곧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존칭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당을 짓고 하느님께 봉헌할 때 예수의 별칭(그리스도 왕, 구원자 등)이나 지상을 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간 성인들(성 베드로, 성 프란치스코 등)의 이름을 따와서 성당 이름으로 짓습니다. 파리에 있는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존칭을 따와서 이름 지은 것이죠.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의 정문-스테인드글라스-내부

  대성당大聖堂이라는 명사는 말 그대로, 큰 성당을 의미합니다. 딱 봐도 노트르담 대성당은 커 보이잖아요? 그런데 정확한 명칭은 대성당이 아니에요. 건축적으로 웅장하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큰 성당을 관용적으로 대성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그냥 굳어진 겁니다. 사실 성당엔 각각의 기능이 부여돼 있어요. 어떤 성당은 동네 주민을 위한 공간 l’église, church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성당은 수도원이나 한 독실한 가문을 위해 지어진 공간 chapelle, chapel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깐 한 성당이 어떤 역할을 하고 맡고 있느냐에 따라서 명칭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래 봐도 성당이 다 같은 성당이 아니라는 것이죠.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문화가 아니고 한국 가톨릭 교회가 세워진지 약 250년도 안되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쓰는 모든 용어가 정확하게 번역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파리에 있는 이 큰 성당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성당의 정확한 이름은 바로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혹은 ‘파리의 성모 주교좌성당’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자체적으로 행정 구역이 나눠져 있는데 바로 이것을 교구 Diocèse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교구를 관리하는 대장이 필요하잖아요. 한 교구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을 주교 Évêque, Bishop라고 합니다. 주교는 가톨릭 교회 성직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직 품계입니다. 바로 이 주교의 의자가 놓여있는 곳, 주교가 상주하며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성당이 ‘주교좌성당 Cathédrale, Cathedral’인 것이죠. 한 마디로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은 파리 교구의 행정 중심지이자 신앙 중심지입니다. 파리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성당 내부 중앙 제단에 멋스러운 의자와 귀족 가문에만 있을 법한 문장이 붙어 있거든요. 바로 그게 주교가 앉는 의자, 주교좌니깐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중심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시떼 섬 Île de la Cité은 파리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대단합니다. 로마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부터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죠. 파리의 역사적 시작이 곧 시떼 섬인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 도로를 환산하는 도로 영점 표지석이 시떼 섬 안에 있습니다. 이 표지석에 발을 올려놓으면 파리에 다시 돌아온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발을 딛고 있지요. 

1550년 파리 시 모습. 시떼 섬에 있는 노르트담 주교좌성당이 보인다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도 이 섬 안에 지어졌습니다. 천오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럽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프랑스였고 프랑스가 곧 가톨릭이었으니 시떼 섬에 상징성 있는 큰 성당을 짓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 역사에 비해 성당 건립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481년에 클로비스 1세 왕이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800년에 샤를마뉴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로마 제국의 주인으로 등극했지만,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은 한참 뒤인 1163년에 짓기 시작해서 1345년에 완료했습니다. 아무래도 중세가 되어서야 큰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발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고딕 성당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 전역에 주교좌성당 건립 붐이 일어났었던 것이죠.


  주교좌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그 도시에서 아주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곧 나라 자체를 의미했었습니다. 교황은 황제를 임명하고 황제는 교회에 충성하면서 신앙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파리 주교는 프랑스 왕의 스승이자 정치 자문인이었지요. 그래서 주교좌성당 옆에는 왕궁이나 시청이 반드시 존재했습니다. 더불어 최고의 교육을 받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학교를 세워 교육과 사법을 담당했고 병원을 세워 시민들의 건강도 책임졌습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전통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은 종교적 의미를 뛰어넘어 한 나라의 사회 시스템이 집약되어있는 중심 중에 중심이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특별한 장소

  한때 유럽에서는 예수의 흔적을 찾아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여행하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4세기에 살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실제로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의 나무 조각과 가시관을 찾아냈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때 찾은 십자가의 나무 조각과 가시관은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에 보관돼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머나먼 프랑스 파리까지 귀중한 물건들이 오게 된 걸까요? 


  성녀 헬레나의 노력으로 찾은 이 두 물건은 이후 천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헬레나만큼 신앙이 두터운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 이름은 바로 프랑스 왕 성 루이 9세(1214-1270)입니다. 루이는 십자군 전쟁으로 어지러운 정세와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동로마 제국의 틈을 이용해 당시 성당 세 채를 지을 수 있는 거금을 들여 십자가의 나무 조각과 가시관을 사 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수의 몸을 찔렀던 창을 포함한 여러 유물까지 사 오게 되죠. 이후 이 유물들을 보관할 성당을 왕궁 내에 짓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생트 샤펠 Sainte-Chapelle입니다. 왕실 성당 겸 거룩한 유물 보관소인 셈입니다. 그래서 따로 이름을 짓지 않고 이름 그대로 거룩한 경당 Sainte-Chapelle이라고 부르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여러 가톨릭 건물들과 왕궁이 파괴되면서 생트 샤펠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은 정부 기관에서 임시로 보관하다가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으로 다시 옮겨지게 됩니다. 지금도 성당 오른쪽에 작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말로도 ‘보물’이라는 단어가 적힌 간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뜨 샤펠과 예수가 썼다고 전해지는 가시관(가시 면류관)



좋아하는 사람싫어하는 사람?

  중세시대 가장 용감한 여인이자 용사! 잔다르크 Jeanne d'Arc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녀는 1412년에 파리 동부 동레미 Domrémy에서 태어났고 1431년 만 19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져 사망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한 소녀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시골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가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했으니깐 말이죠. 정치적인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당시 가장 높은 성직자였던 여러 추기경과 주교들 앞에서 누구보다 정확하게 가톨릭 교리를 읊고 신앙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잔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지긴 하지만 그녀의 죽음엔 분명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 정치적인 이유와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 투쟁이 뒤섞여 낳은 결과였으까요. 프랑스, 영국 가톨릭 교회가 크게 잘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 Patron saint이라면 믿으시겠어요? 심지어 잔다르크의 탄생 600주년 행사에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교회에게 잔느는 성인입니다.
공화국에게 잔느는 애국심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가치를 구현한 화신입니다.
Nicolas Sarkozy, Le 6 Janvier 2012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억울한 죽음은 곧 밝혀지기 마련이죠.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25년 뒤인 1456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에서 잔다르크의 종교재판을 다시 열게 합니다. 마침내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가 선언되고 거룩한 순교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죠. 그래서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안에 갑옷을 입고 거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성녀 잔다르크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잔다르크가 신앙과 애국심의 상징으로 존경받게 되고 성인으로 선언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입니다.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에 세워진 잔다르크 동상,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자크루이 다비드, 1808년 /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정치인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교회의 이단아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평가가 엇갈리는 거죠. 그 당시 나폴레옹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대관식’입니다. 우리에게도 교과서를 통해 친숙한 그림이지만 사실 이 한 점 안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림을 살짝 살펴보겠습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열린 장소는 1804년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 나폴레옹의 머리에 이미 황금 월계관이 쓰여 있는 걸 보면 이미 자신의 대관식은 끝난 것 같습니다. 이제 왕비의 황금 왕관을 번쩍 들어 올려 그의 아내 조세핀에게 씌어주려고 하고 있죠.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유럽 황제들의 대관식은 대대로 교황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스스로 자기 머리에 왕관을 쓰고 조세핀에게도 왕관을 씌어줬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직자가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단에 올라서서 의식을 치렀죠. 그림을 자세히 보면 나폴레옹 등 뒤로 교황 비오 7세는 초라하게 앉아 있고 추기경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관식을 지켜봅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랜 시간 프랑스 국가 종교였던 가톨릭을 이용해 정치적 자리를 확보하고 권력을 유지했죠.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교황청까지 뻗으려고 했습니다. 대관식 이후 1808년 로마 교황청까지 점령해 교황 비오 7세를 감금까지 해버립니다.



아픔 속에 살아남은 파리 노트르담

  사실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이전에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직격탄을 맞아 무너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가톨릭 성직자는 귀족보다 높은 신분층이었고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성직자 월급도 나라 세금으로 줬지요. 마치 공무원처럼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성직자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성직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가톨릭 교회에까지 그 힘이 닿고 말았죠. 성당 건물은 파괴되었고 재산은 압류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은 국가에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형선고를 내려버렸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세력에 의해 성당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모독을 당했습니다. 더 이상 가톨릭 교회를 위한 종교적 공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교도 신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포도주 저장고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성당 내외부에 세워져 있었던 많은 성상들이 목이 잘리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과 교황청의 협약으로 가톨릭 교회의 지위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으로 어느 정도 복구가 이뤄졌지만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의 본래 모습은 되찾지 못했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파리 도시 개발 계획에 의해 흉물스러운 성당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빅토르 위고가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는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Dame de Paris를 썼으니깐요. 우리에게 노틀담의 곱추로 더 유명한 이 소설은 한 박에 대박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소설 배경으로 향하게 했으니깐 말이죠. 덕분에 1845년 파리시는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복원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때 성당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던 가장 높은 첨탑까지 복원되었죠.


1859년과 2022년 재건 중인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하지만 지금 우리는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겉모습도 공사판에 가려져 있어서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2019년 4월 15일 저녁, 성당 첨탑에서 시작된 불이 성당을 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 친구가 성당 안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비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합니다. 사실 개신교 신자였던 제 친구는 아무런 설명 없이 쫓겨 나온 것 같아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쫓겨난 건가 하고 실망했었다고 해요. 하지만 몇 분뒤, 갑자기 불꽃이 휘몰아치더니 첨탑이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화재 사건 이후 프랑스 정부에서는 이 건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었습니다. ‘아니, 그냥 성당이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거기까지 다다르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톨릭 교회 재산이 압류당하고 1905년 종교 분리법이 생기면서 법적으로 프랑스 성당은 정부 관리 건물이 되었거든요. 가톨릭 교회가 실질적으로 성당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주인은 따로 있는 겁니다. 정부에 전달된 여러 의견 중 하나를 소개해드리면, 성당의 기능을 상실시키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당 지붕을 유리로 뒤덮어서 공중 정원을 만들거나 수영장으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거죠. 이에 대해 당시 파리 교구장 주교는 무너진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비집고 들어가 미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 주교좌성당은 미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고도 본래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곳은 절대 관광장소가 아닙니다!
Le 6 Juin 2019, Mgr Michel aupetit


  프랑스 정부는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목표로 원래의 모습으로 또 전통방식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행이죠? 언젠가 제 프랑스인 빠리지앵 친구는 “에펠탑을 안 보는 것은 파리를 안 왔다는 것이고,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안 들어가 본 것은 프랑스를 방문하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더군요. 이곳에서 여러 번 미사를 드려본 저에게는 퍽 마음에 와닿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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