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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Sep 13. 2022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파리 기적의 메달 성모 경당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3

  파리가 유럽 패션의 중심 도시라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매년 열리는 패션쇼에서 내보이는 옷들은 전 세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죠. 그래서 그런지 관광객들은 파리의 유명한 백화점들을 돌면서 파리지앵처럼 옷을 입어보고자 쇼핑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중 르 봉마쉐 Le Bon Marché백화점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으로 유명합니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패션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르 봉마쉐라는 뜻은 프랑스어로 좋은 가격이라는 뜻인데 평소에 “물건이 싸고 좋아!”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건이 결코 싸지 않죠. 개인적으로 저도 여러 번 들어가 봤지만 한 번도 지갑을 열 수 없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 주변에서 똑같은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이 자주 오 다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녀님들 뿐만 아니라 신부님들도 보이고 또 단체로 성가를 부르며 걸어 다니는 가톨릭 신자들까지 쉽게 만날 수 있지요. 아니, 도대체 그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쇼핑을 하려고 여기에 서성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바로 르 봉마쉐 백화점 바로 앞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성모 성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 성지! 백화점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굉장히 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패션의 시작점라는 겁니다. 


파리 르 봉마쉐 백화점과 맞은편에 있는 기적의 메달 성모 성지


한 여름밤에 일어난 일

  사실 이곳은 처음부터 성모 성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부터 지금까지 수녀님들이 거주하며 기도하는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죠. 그런데 어느 날 여기서 살고 있었던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수녀원은 곧 성모 성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830년 7월 한 여름밤의 일이었습니다.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카타리나는 어느 아름다운 목소리에 잠을 깨게 되죠. 그녀를 부른 건 소년의 모습을 한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수도원 경당에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곧장 가보라고 요청합니다. 매우 놀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하죠? 카타리나가 딱 그랬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바로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안심시킨 후 직접 경당까지 이끌고 갑니다.


  보통 수도원의 일상은 밤 9시 전후로 끝이 납니다. 수도자들은 저녁 기도와 식사 그리고 이어지는 끝기도를 바치면 각자 방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감하죠. 경당도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어두컴컴하기만 할 겁니다. 그런데 카타리나가 다다른 경당은 누군가 곧 사용할 것처럼 모든 촛불에 불이 켜 있었고 어느 때 보다 더 밟은 빛이 창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미사를 드리는 제단 한가운데로 카타리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죠. 


카타리나 수녀와 성모 마리아의 만남 / 생전 그녀의 모습


  “복되진 동정녀께서 여기 계십니다” 천사가 반복해서 외치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제단 위에서 한 여인이 카타리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성모 마리아의 무릎 위에 합장한 손을 얹으며 존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죠. “나의 딸아,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사명을 주려고 하신다. 그 일을 하려면 너는 많은 고통을 감내야 해야 하지만 곧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어 마리아는 조만간 프랑스에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 무서운 일이 곧 닥칠 것이며 왕정은 무너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아 피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말이죠. 그 일은 정말로 일어났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왕정은 무너졌고 가톨릭 교회는 파괴되어 사제, 수도자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카타리나 수녀가 머물렀던 수도원도 혁명군에 의해 포위를 당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벽돌 하나 무너트리지 않고 바로 떠났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남긴 것

  같은 해 11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카타리나 수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수녀원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시 한번 성모 마리아가 그녀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커다란 지구 위에 뱀을 밟고 서 있었고 십자가가 꽂힌 작은 지구 모양의 구를 손에 들고 있었죠. 곧이어 마리아의 손에서 밝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녀가 밟고 있던 큰 지구를 비추었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이 지구는 세계, 프랑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빛들은 나에게 청원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은총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구나.” 


  마리아는 카타리나에게 이 말을 한 뒤 양팔을 아래로 넓게 펼치며 주위에 테두리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거기엔 이런 글씨가 금빛으로 쓰여 있었죠.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님, 당신께 청원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Ô Marie, conçue sans péché, priez pour nous qui avons x à vous.’ 마리아는 지금 목격한 모양 그대로 메달을 만들기를 요청합니다. 사람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다니면 누구나 은총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죠. 이윽고 마리아는 사라지면서 카타리나가 만들어야 할 메달의 뒷면까지 아주 친절하게 보여줍니다. 커다란 M자 위에 십자가가 있고 그 밑에는 두 개의 심장이 있는데 각각 가시관과 칼이 꽂혀 있는 모습이 예수와 마리아의 마음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으론 열 두 개의 별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후 성모 마리아는 카타리나 수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나타나 메달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차고 다니게끔 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파리 교구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이름 모를 한 수녀에게 나타나다니? 그 수녀가 어떤 사람인데? 하필 그녀에게 왜? 그냥 헛것을 본 게 아닌가? 각종 추측이 뒤따랐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톨릭 교회의 이 천년 역사 안에서 기적이라고 주장한 사건이 여러 번 있었지만 공식으로 인정한 건 몇 개 없거든요. 전문용어로 사적 계시 特別啓示라고 말하는 데 개인적으로 마주한 환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공증되지 않은 가르침으로 잘못된 신앙을 갖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오랜 시간 신중한 조사와 함께 가톨릭 교회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일깨울 수 있는 사건이라면 기적 사건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새로운 패션(?)

  파리 대주교는 카타리나 수녀의 고해성사 신부를 통해 얘기를 듣고 철저한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교회가 가르치는 어떤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죠. 이렇게 되면 카타리나 수녀는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조사 기간 내내 이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은 그저 한 수도자일 뿐이니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나겠다고 말이죠. 대신 성모 마리아가 부탁한 메달을 제조하는 데에 온 힘을 쏟습니다.

  마침내 1832년 6월에 최초의 메달이 주조됩니다. 카타리나가 봤던 그 모양 그대로였습니다. 처음에는 수 천 개의 메달을 만들었지만 이후 급속도로 이 메달을 착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수 백만 개를 만들기에 이르죠. 그리고 이 메달을 착용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환자들이 치유되기도 하고 프랑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죠. 또 여러 사고와 어려움에서 보호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주관적인 일들이라 사실관계를 따지기 어렵겠지만 분명한 건 이 메달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건 확실해 보입니다. 지금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메달이 주조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파리의 한 작은 수녀원에서 만든 이 메달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 목에 하나씩 걸려있게 된 거죠. 나름의 새로운 가톨릭 패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표현일 겁니다. 


전 세계에 보급된 기적의 메달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길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수녀원 경당은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습니다. 카타리나 라브레 수녀의 증언으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지점까지 표시해 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카타리나 라브레 수녀도 이 경당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녀의 죽음 이후 다른 곳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그녀를 성녀로 선포하기 위한 과정에서 지금의 경당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카타리나의 시신을 옮길 당시, 매장한 지 약 6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부패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녀의 눈마저도 푸른 빛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죠. 이 경당의 이름 그대로 기적으로 가득한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 경당은 성모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당 Chapelle, Chapel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수녀님들이 거주하며 수도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당은 작은 성당을 뜻하는데 정식 성당은 아니고 특정한 공동체나 가족을 위한 별도의 성당을 말하거든요. 하지만 제 생각엔 여긴 결코 작은 성당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뿌린 기적의 씨앗은 전 세계에 뿌리내려 자라고 있으니깐요. 가끔은 작은 공간에서 거대함을 느낄 때도 있답니다. 바로 이곳처럼요.



보너스로 알면 좋은 또 다른 경당

  이왕 소개한 김에 한 곳 더 알려드리고 싶은 경당이 하나 있습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 경당에서 결코 멀지 않거든요. 바로 옆에 또 다른 경당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랍니다. 바로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주님 공현 경당입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는 1658년 아시아 선교를 위해 설립된 프랑스 가톨릭 선교회예요. 우리나라의 요청으로 19세기 초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했었죠. 그 당시 아시아 선교를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많은 신부님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조선에 가기를 희망했고 대부분 우리나라 땅에서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이 선교회 소속 사제 10명이 성인 Saint으로 선포되었죠.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주님 공현 경당


  주님 공현 경당 Chapelle de l'Épiphanie은 파리 외방 전교회의 공동체 성당이면서 우리나라 선교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으로 파견되기 전, 모든 신부님들은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마당으로 나가 선교사 파견 예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당 왼쪽에는 ‘선교사들의 출발’이라는 아주 큰 그림이 걸려있는데 바로 조선으로 향하기 전 네 명의 신부님들을 그려 놓은 것이랍니다. 또 마당에는 너무 친숙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2003년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 신자들이 고마움을 담아 세운 것이죠. 이뿐일까요? 경당 지하에 있는 작은 박물관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님들의 선교 기록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요. 당연히 한국어로 전시된 귀중한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눈길을 끌었던 건 박물관 입구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었어요.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인으로 선포된 103명의 이름이 한글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그들의 유해가 일부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죠. 지금도 프랑스와 한국의 인연은 파리 외방 전교회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년 주님 공현 경당에서 박병선 박사의 장례미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파리 국립 도서관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와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장본인입니다. 또한 한국의 젊은 신부님들은 이곳에 머물며 유학 생활을 하고 있고 프랑스 신부님들은 아직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어두운 곳에 빛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출발 그림 / 한국 순교자 이름이 새겨진 제대 / 한국 신자들이 세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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