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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Sep 18. 2022

역사가 켜켜이 쌓아 올린,
엑스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5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좌성당을 뽑으라면 바로 엑상프로방스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5세기에 첫 성당을 지었으니까 무려 1500년이나 되었거든요. 역사 안에서 우리나라와 비교를 하자면 고구려의 장수왕이 막 영토를 넓히고 있을 때 엑상프로방스에선 이 성당을 짓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성당을 처음 마주하면 썩 그렇게 멋있는 건물이라고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공사를 하다가 멈춘 것처럼 모든 선이 빼뚤빼뚤하고 좌우대칭이 맞지 않거든요. 어쩌면 북부 프랑스에 많이 세워진 반듯한 고딕 성당을 보다가 이 성당을 바라봐서 더더욱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보아야 또 계속 보아야 진한 매력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죠.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을 하나하나 뜯어서 다시 보고 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알면 그 오묘한 매력에 금방 빠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이 성당을 이제야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왜냐하면 제가 프랑스에서 오 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는데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이 위치한 엑상프로방스에서 쭉 살았거든요. 제가 살던 집도 그리 멀지 않아서 매일 성당 종탑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요일마다 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기 때문에 저의 정이 듬뿍 배겨진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자, 이제 엑상프로방스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을 낱낱이 파헤쳐보겠습니다.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프로방스

  엑상프로방스는 로마 제국이 세운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프랑스까지 뻗은 로마 제국의 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방 관청을 세워 행정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 엑상프로방스를 꼭 들려야 했습니다. 여기서 행정처리를 하고 긴 여정에 필요한 물건도 사면서 며칠씩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위치한 마르세유 항구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갔죠. 무엇보다 엑상프로방스는 물이 풍부했습니다. 북부에는 무수히 많은 산이 있고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어서 자연스레 지하수가 형성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개발해 도시 곳곳에 분수를 세우고 또 온천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휴양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로마 군대도 주둔했습니다. 로마 군대가 있으면 포도밭이 같이 경작되어 포도주가 생산되었는데 프로방스 특유의 강한 햇빛과 석회질이 풍부한 땅으로 최고의 포도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프로방스 로제 와인은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죠.


  이렇게 행정, 군사, 상업 등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에 종교 시설이 당연히 존재했을 겁니다. 로마 제국은 전통적으로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교 국가였는데 엑상프로방스에는 아폴론 신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빛을 상징하고 음악과 시를 관장하는 아폴론 신! 이 지역과 너무 걸맞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하면서 상황은 갑자기 변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종교거든요. 그래서 로마 시를 중심으로 기존에 세워진 다신교 신전을 무너트리고 성당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엑상프로방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던 아폴론 신전은 금세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성당을 지었는데 바로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입니다. 



어디에도 이런 성당은 없다?

  사실 주교좌성당을 짓기 전부터 엑상프로방스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이스라엘 땅을 건너 여기에 정착한 성 막심 Saint Maxime이 처음 그리스도교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작은 경당을 세우면서 거룩한 구세주인 예수에게 바쳤는데 여기에서 생소뵈르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고 있죠. 생소뵈르를 번역하면 거룩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성 막심이 세운 경당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경당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당시의 기록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5세기에 아폴론 신전을 무너트리고 정식으로 새로 지은 성당의 모습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바로 생소뵈르 주교좌성당 안쪽에 있는 세례당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식을 바라보는 사람들 (뫼니에 作, 1792) / 현재 세례당 모습


  세례당은 말 그대로 세례 예식을 행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예식이죠. 예식 중엔 성경에 쓰인 기록에 따라 물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물은 정화를 상징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보여주거든요. 지금이야, 세례 예식이 많이 간소화됐지만 과거에는 반드시 온몸을 물구덩이에 담가야 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 많은 물을 어디서 가지고 왔을까요? 세례를 주는 사람 또 받는 사람까지 최소한 두 사람이 들어가야 하는 공간에 물이 가득 채워져야 할 텐데요. 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엑상프로방스는 물의 도시거든요. 무엇보다 성당과 함께 세례당이 위치한 곳은 시내 중심가였습니다. 로마인들이 만들어 놓은 온천과 수로가 너무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이용했습니다. 세례당까지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8개의 기둥을 세워서 돔을 만들었습니다. 기둥 사이사이에 천을 덧씌워서 세례 예식을 마친 사람들이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게 했죠. 그런데 여기에 세워진 기둥은 색깔이 서로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왜냐하면 몇 개는 무너진 아폴론 신전에서, 또 몇 개는 주변에 있었던 로마 포럼에서 가져와 세웠기 때문입니다. 천 오백 년 동안 돔을 지탱해 온 기둥과 돔 사이사이로 비치는 현재의 빛이 오묘한 조화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세례당 아래로 흐르던 물길이 막혀 있지만 그 대신 현대식 욕조를 올려서 전기로 물을 따뜻하게 데우고 세례 예식을 하고 있습니다.


엑상프로방스 라 로통드 분수


짬뽕에 짬뽕을 더한 건축

  지역에 세례당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사실을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교가 거주한다는 것입니다.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는 반드시 주교가 행하는 예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주교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성직자는 귀족층에 속했고 주교는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였습니다. 중세 시대에 갈수록 그 역할은 점차적으로 거쳤고 주교좌성당은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크고 많은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세례당을 중심으로 성당도 짓고 사무실도 짓고 주교가 거주하던 집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많은 건물이 훼손되었고 사람들은 남아있는 부분을 이용해서 증축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침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10세기 전후로 많이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이 도입된 것이죠. 


  12세기에 들어서는 엑상프로방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동시에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오는 사람도 많아지면서 기존의 규모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다시 증축의 필요성을 느낀 겁니다. 이때는 새로운 건축 양식이 개발되어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유명한 고딕 양식이죠. 이제는 하늘 높이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더 넓은 지붕을 얹혀 큰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세례당과 여러 부속 건물을 이어서 하나의 성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1425년엔 아주 큰 종탑도 세웠습니다. 


성당 내부 / 시기별 증축 안내문


  이후에도 주교좌성당 증축은 계속 이뤄집니다. 17세기엔 바로크 양식으로, 19세기엔 네오고딕 양식으로 공간을 확장해 갔습니다. 마지막 공사는 1999년이었습니다. 가톨릭 미사 예법이 바뀌면서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여기엔 현대적 공법을 이용해서 중앙 제단을 쌓고 금속으로 부속 용품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무려 천 오백 년 동안 계속 이어진 공사!!! 하지만 이 덕분에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은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증축을 했지만 뜻하지 않게 그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최신 건축 기법이 켜켜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한 공간에서 모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거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문

  생소뵈르 주교좌성당엔 아주 비밀스러운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508년에 제작된 성당 정문입니다. 얼핏 보면 평범한 나무판자가 걸려 있어서 무엇이 비밀스럽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법! 마치 비밀의 문처럼 나무판자 뒤로 진짜가 존재하고 있죠. 이 정문은 고딕 양식으로 증축하던 시기에 마지막 작업으로 진행됐습니다. 프로방스에서 유명한 조각가인 레이몽, 쟝 형제 frères Raymond et Jean Bolhit와 툴롱의 조각가 쟝 귀라망Jean Guiramand 이 성당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호두나무를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호두나무는 색깔이 아름답고 단단해서 아주 고급스러운 목재입니다. 오랜 전통이 숨 쉬는 주교좌성당에 걸맞은 소재였던 것입니다. 


  보통 성당 정문에는 최후의 심판과 같이 사후 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새겼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걸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각인시키고 있었죠.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의 호두나무 정문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조각으로 새겼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구원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완성된 문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예언자들의 표정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얼마나 세밀하게 표현했는지 얼굴 표정, 수염은 물론이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이파리 장식까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평소 닫혀있는 정문과 특별한 날에 공개하는 정문 조각


  오백 년 넘게 주교좌성당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이 아름다운 정문은 유럽 전역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조각을 보려고 엑상프로방스에 몰려왔습니다. 아마 문짝을 뜯어서 갖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무거운 문을 어떻게 들고 갈뿐더러 다른 문도 아니고 주교좌성당 문을 어떻게 욕심을 내겠어요? 그러나 단 한 사람, 쟝 푸쟈두Jean Pouzadoux라는 프랑스 조각가는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 정문을 똑같이 베껴서 석고 복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문에 새겨진 조각뿐만 아니라 문설주와 상인방 그리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중 하나는 파리 건축 문화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는데 유럽 왕가의 할머니라고 일컫는 빅토리아 여왕은 예술을 너무 사랑했고 어떻게 하면 영국에 훌륭한 예술인을 양성시킬지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찰나, 그녀는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 정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정문을 똑같이 베낀 복제품을 사들여 박물관에 항시 전시하게 한 겁니다. 미술 학생들이 직접 보고 배우라는 뜻에서 말이죠. 



신비한 엑스와즈 여인

  긴 역사를 가진 주교좌성당인 만큼 무수하게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아주 신비한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1631년에 태어난 쟌느 페로 Jeanne Perraud라는 여인은 몰락한 부르주아의 딸이며 엑스와즈 Aixoise입니다. 엑스와즈는 엑상프로방스에 오래 산 여성을 부르는 별칭입니다. 마치 파리에 사는 사람을 파리지앵, 파리지앵느 라고 부르는 것처럼요. 그녀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허약한 몸으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힘든 순간마다 유일하게 위안을 받고 기댈 수 있는 곳은 가톨릭 교회였죠. 그래서 수녀가 되고자 우르술라 수도회, 도미니칸 수도회 등 연속적으로 세 곳에서 수도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꿈을 접게 됩니다. 대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훌륭한 한 신자로 살 것을 결심합니다.


  쟌느는 작은 경당을 세우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한 신자였지만 마치 수도자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던 겁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고 성경을 매일 읽고 또 예수를 향한 사랑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1658년 그녀는 경당에서 아기 예수의 환시를 봤다고 주장합니다. 밤색 곱슬머리를 한, 세 살가량의 아기가 십자가를 들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묘사가 얼마나 구체적인지요! 이 환시는 몇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예수가 서른 살이 넘은 건장한 청년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체험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어요. 자신이 성령과 자주 소통을 하며 예수와 똑같은 다섯 상처를 받았다고 했죠. 예수의 다섯 상처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양손과 양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입은 상처를 말합니다.


환시로 본 아기 예수를 형상화한 밀랍 인형


  엑상프로방스 사람들은 쟌느를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사회에 영광의 빛을 가져왔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쟌느는 1676년에 일찍 세상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장례식장에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해요. 어떤 사람들은 살아있는 성녀의 물건을 하나라도 얻어보고자 관 주변을 기웃거렸다고 하죠. 화가들은 쟌느의 믿음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환시에서 만난 아기 예수의 형상을 판화로 찍고 예술가들은 밀랍 인형을 만들었습니다. 그 효과는 엄청났나 봅니다. 무려 백 년 동안 쟌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인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요? 바로 성인 Saint으로 추대하려고 하려고 하겠죠. 지금도 그렇지만 성인이 되려면 정말로 훌륭한 신앙인이었는지 일생일대의 모든 순간을 조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그녀를 성인 후보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쟌느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견 됐거든요. 그녀는 오랫동안 정신적 질환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곧 환시에서 본 아기 예수가 가짜라는 말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쟌느의 일생은 가톨릭 교회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고난을 따라서 희생의 삶을 사는 건 좋았지만 너무 혹독하게 수행을 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했던 겁니다. 엑상프로방스 사람들은 실망하기보다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작된 환시 속 아기 예수의 모습을 표현한 밀랍 인형은 지금도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 한쪽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프로방스의 노오란 상징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0년 종교 분리법 제정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정부에 귀속시키게 했습니다.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 있는 부속 건물까지 정부 소유가 된 것입니다. 특히 엑상프로방스 가톨릭 교회가 업무를 보던 교구청과 주교가 대대로 살았던 주교관은 박물관과 극장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다행히 주교좌성당은 종교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자유로이 사용하고 있죠. 또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역사적 기념물 Monument historique로 지정되어 보호도 받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정부의 공동 관리인 셈입니다. 이 오묘한 관계 속에 생 소뵈르 주교좌성당은 여전히 영롱한 노란빛을 내뿜으며 프로방스 지역의 대표적 성당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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