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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Sep 26. 2022

마르세유의 좋은 어머니,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6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어디일까요? 파리에서 남쪽으로 750km 떨어져 있는 도시! 파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9시간 동안 쭉 달려야 나오는 그곳! 바로 마르세유 Marseille입니다. 프랑스어로 정확한 이름은 막세이라고 해요. 아름다운 지중해에 접해 있어서 휴양도시로 유명하고 또 오래전부터 무역으로 번성한 바닷가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과 같은 도시라고 말할 수 있죠. 그래서 매일 아침 마르세유의 바닷가엔 다양한 모습이 펼쳐집니다. 어부들은 새벽부터 잡은 싱싱한 물고기를 팔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해외로 수출할 물건들이 큰 배에 실어집니다. 바로 옆에선 지중해를 가로질러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지요. 더불어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봄부터 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해변에선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문화도 다양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사람들, 세대를 거쳐 여기에 정착한 베트남과 중국 사람들 등 다양한 인종과 전통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도시입니다.


마르세유 항구


  이런 팔색조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 장소를 바라봅니다.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성당,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을 향해서 말이죠. 어디서든지 볼 수 있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또 반대로 이곳에 올라가면 마르세유가 한눈에 보입니다. 성당 마당을 한 바퀴 돌면 저 멀리 지중해 수평선부터 시작해서 시내 중심지역 그리고 한 시간 이상 자동차로 가야 하는 시 외곽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이 마르세유의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세이예(마르세유 사람)들도 제 말을 동의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마르세유의 상징은 곧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이니까요.



800년 역사의 시작

  “또 노르트담 성당이야?”라고 빈정거리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에는 노트르담 이름을 가진 성당이 많이 있거든요. 노트르담 드 파리, 노트르담 드 라 그라스, 노트르담 데스페랑스, 노트르담.. 노트르담.. 정말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중세 시대에 고딕 양식이 유행하면서 노트르담이라는 성모 마리아의 호칭도 함께 유행한 듯합니다. 그 당시에 지어진 고딕 성당은 대부분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거든요. 마치 김연아 선수가 피겨 붐을 일으키고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지면서 그녀의 세례명인 스텔라가 한동안 유행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금 소개하는 마르세유에 있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도 그 유행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1214년 중세시대에 처음 지어졌기 때문이죠. 마르세유의 한 신부님이 라 가르드 La Garde라고 불리던 언덕에 성모 마리아를 위한 작은 성당을 지으면서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라 가르드’라는 프랑스 말은 보호, 돌봄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지금처럼 대도시로 변화하기 전에 마르세유는 외적 침입에 아주 취약한 곳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바닷가 도시이기 때문에 외부인에게 쉽게 노출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특히 지중해 연안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침략해오는 이슬람 세력이 많았습니다. 언제 위협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늘 바다와 평지를 바라보며 감시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감시를 하기 위해선 가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세워서 보초를 서야 했겠죠. 마르세유에선 바로 라 가르드 언덕이 이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세유의 신부님은 여기에 성당을 세웠을까요? 그동안 무력으로만 도시를 보호하려고 했으니까 이제 영적인 힘까지 더해서 마르세유 사람들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 담은 것입니다. 특히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 큰 도움을 요청하고 어머니의 따뜻한 품처럼 사람들을 지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라 가르드 언덕의 옛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의 침입은 더 빈번해졌습니다. 이슬람 세력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도 침략을 해왔습니다. 당시 독일 지역에 강성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지금의 스위스 지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국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마르세유는 알프스 산맥의 끝자락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평탄한 지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이 육로를 통해서도 손쉽게 침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를 통해서는 이슬람 세력이, 육지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사방팔방으로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마르세유 시민들은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실제로 정복전쟁에 사활을 걸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는 마르세유를 포위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결사항전으로 버틴 프랑스 군대와 마르세유 시민들 덕분에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1세 왕은 마르세유를 요새화 하는데 공을 들였거든요. 그는 마르세유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이프 섬 Île d'If과 원래 망루로 사용했던 라 가르드 언덕에 있는 성당을 중심으로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폴 시냑  '마르세유 항구' 1905 /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소장



바다 사람들의 등대 같은 성당

  군인들이 밤낮 가릴 것 없이 요새를 지키고 있으니 마르세유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프 섬에 지어진 요새는 아무래도 지중해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쉽게 다니지 못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마르세유 사람들은 라 가르드 언덕에 올라 성당에서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았습니다. 성당에 있으면 누가 침범해 올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기도하면서 마음의 안정도 취할 수 있으니까요. 16세기 말부턴 항해를 나가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에 와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좋은 바다는 매우 아름답지만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는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바람과 노의 힘으로 배를 움직여야 했기에 자연에서 오는 어려움은 인간이 감히 뛰어넘을 수 없겠죠. 또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로 보낸 가족들의 마음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겠네요. 그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길 기도하고 또 기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항해자들은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저 멀리 보이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을 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았습니다. “아 이제 집에 왔구나!” 그들에게 이 성당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등대이자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거룩한 성지였습니다. 항해를 마치고 가족들과 재회한 사람들은 곧바로 라 가르드 언덕을 올랐습니다.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고마움 또 안타깝게 돌아오지 못한 동료의 넋을 기억하면서 성당에서 기도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로써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든지, 가장 소중한 물건을 바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드러냈죠. 자신의 배를 목각 인형으로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성당 내부에 거는 사람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걸 보고 생각해보니 더 효율적인 것 같은 거예요. 굳이 돈다발이나 무거운 금붙이를 들고 높은 언덕을 오를 필요가 없거든요. 사람들은 성당 천장에 줄을 하나씩 매달아 놓고 무사히 돌아올 때마다 자신이 탔던 배를 목각 인형으로 만들어서 내걸었습니다. 그림도 벽에 많이 걸었죠.


대성전 내부


종교를 뛰어넘어 마르세유의 상징으로

  19세기부터 마르세유 항구의 역할이 중요 해졌습니다. 운송 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은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국이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앞으로 활발해질 해상활동에 온 이목이 쏠렸습니다. 이미 마르세유 항구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 도시였지만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닥뜨린 겁니다. 마르세유 인구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은 곧 무엇이겠어요? 마르세유 사람들이 언제나 의지했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겠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뱃사람과 그 가족들의 마음은 국적을 불문하고 같거든요. 


  기존의 성당으로는 더 이상 찾아오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성당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이 위치한 언덕엔 군사 시설도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당 관계자와 국방부 그리고 군 장교들과 벌인 토론 끝에 군사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대폭 줄이는 방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53년 당시 마르세유 교구장인 외젠 드 마제노 Eugène de Mazenod주교의 첫 삽으로 재건축이 시작되었죠. 건축은 앙리 자크 Jacques Henri Espérandieu가 설계했습니다. 그는 독특하게도 가톨릭 신자가 아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마르세유를 사랑하는 한 막세이예였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1910년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


  생각보다 어려운 공사였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대형 성당을 하나 지어야 했으니 기초 공사가 꽤나 중요했을 겁니다. 또 예상보다 많은 예산이 지출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신자들의 헌금과 마르세유 시의 재정적 도움으로 1864년 미완성된 종탑을 내버려 둔 채 성당 축성식을 합니다. 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내부는 완벽하게 완성했으니 일단 사용부터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삐쭉삐쭉 하늘로 높이 치솟게 만들었던 프랑스 성당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참고하여 프로방스에서 채굴한 하얀 석회암과 피렌체에서 사 온 초록색 돌을 번갈아 쌓았습니다. 공사는 계속되어 마침내 종탑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1870년 황금을 씌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을 세웠습니다. 무려 10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입니다.



아시아를 가려면 마르세유를 통해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은 우리나라랑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모든 배는 마르세유 항구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선으로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을 포함해서 아시아 선교를 위해 세워진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도 모두 마르세유 항구를 통해 떠났습니다. 수개월에 걸쳐 낯선 곳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바로 마르세유에서 시작되었던 겁니다. 수백 년 동안 으레 그래 왔던 것처럼 사람들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에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사실 이건 너무 머나먼 과거의 일이 아니에요. 무려 1960년까지 아시아로 가기 위해선 마르세유 항구를 이용해야 했거든요.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프랑스 선교사 두봉 주교도 1954년 당시 꼬박 두 달 동안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다고 말하기도 했죠. 최근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이 프랑스를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영적인 어머니 역할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식을 남겼습니다.


마르세유 항구를 떠나 그들이 태어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마지막 기도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으로 향했던 1200명의 선교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선교사들의 사명을 위해 그들을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년 10월 17일


  마르세유 사람들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전을 ‘마르세유 사람들의 좋은 어머니 Bonne mère des marseillaises’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수백 년 동안 여러 아픔과 절망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고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품어 줬기 때문이겠죠. 


좋은 어머니 성당 내부에 새겨진 파리 외방 전교회의 감사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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