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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Oct 05. 2022

아픔 위에 아픔을 쌓은,
아비뇽 주교좌성당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8

  제가 아비뇽에 갈 때마다 들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 우리는 춤을 추네 춤을 춰~

아비뇽 다리 위에서~ 우리는 둥글게 춤을 추네~”


 ‘아비뇽 다리 위에서’라는 프랑스 민요입니다. 여기서는 남녀, 각계각층이 모여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아비뇽 다리라고 일컫는 생 베네제 다리 Pont Saint-Bénezet위에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노래를 부릅니다. 누군가 시작만 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따라 부르는데 어떤 분들은 춤까지 추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다리는 끊어져 있습니다. 아비뇽 바로 앞에 흐르는 론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다리가 무너졌거든요. 여러 번 수리했지만 또 무너져버리고… 지금은 포기해 버린 지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당장이라도 이 끊어진 다리를 없애 버릴 법도 싶지만 어딘가 아비뇽이라는 도시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다리 바로 뒤엔 도심을 따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성곽이 있고 또 성 안에도 엄청난 위용을 보여주는 큰 성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치 ‘누구도 땅과 강으로 침범해 오지 마라!’ 고 외치는 듯합니다.


끊어진 생 베네제 다리

  정말로 아비뇽 성곽과 성은 누군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불안하게 살았던 나머지 출입구는 좁게, 창문은 작게 만들어서 아예 외부와 단절을 하며 살게끔 만들어 놓았습니다. 너무 삭막하죠? 이 정도 건축을 지을 만한 사람이면 재력도 충분하고 권력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도대체 누가 살았길래 자신을 꽁꽁 숨기며 살려고 했을까요? 그들은 현재 아비뇽의 노트르담 드 돔 주교좌성당에 잠들어 있습니다.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인 교황입니다. 자, 이제부터 교황의 무덤이 왜 여기에 있고, 왜 철옹성 같은 성당과 성벽이 세워졌는지 사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비뇽 교황청


프랑스와 교황의 관계

  먼저 교황이 무엇인지, 성당이 지어졌을 당시 유럽 상황을 간단히 살펴봐야겠어요. 교황직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이어오고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의 열 두 사도 중 한 명인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여 2천 년이란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 역할도 다양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 로마 교구장 주교, 바티칸 시국 군주, 그리스도의 대리자 등이 있습니다. 독특한 점이 하나 있는데 교황직은 바로 선출직이라는 것입니다. 교황이 죽으면 고위 성직자인 추기경들이 모여 투표를 합니다. 모든 추기경이 교황 후보라서 어떤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될지는 감히 예상도 못하죠.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교황 선거가 있을 때마다 어느 나라 출신 추기경이 교황직에 뽑힐지 관심이 높습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 전임자였던 베네딕도 16세는 독일 출신, 그 전전임자였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출신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교황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한때 교황직은 이탈리아의 전유물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교황청이 있는 로마는 이탈리아 땅 안에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로마에 가면 발길 닿는 곳마다 성당이 즐비합니다. 이탈리아는 곧 가톨릭 교회 또 교황으로 이어지는 게 공공연한 관습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틀을 깨고 싶어 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오랜 시간 교회의 맏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였고 국교로 받아들여 크게 발전해 온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프랑스는 교황에게 잘 보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아직 통일되지 않은 이탈리아 땅에서 교황직이 여러 번 위협을 당하자 바로 군대를 파견해서 도왔고, 심지어 교황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땅을 바쳤습니다. 이게 교황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인 교황령입니다. 대신 교황은 유럽의 유일한 군주직이 프랑스에게 있다고 선언하면서 막강한 힘을 실어줬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교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17세기 아비뇽 지도 / 생 베네제 다리도 끊어져 있다


누가 유럽의 일짱인가

  그런데 13세기부터 이 두 세력 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프랑스는 꿈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언젠가 교황을 뛰어넘어 온 유럽의 일인자가 되고 싶은 욕심 말이에요. 당시 유럽 사회는 다단계 구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충성을 하는 계약 관계였습니다. 만약 하나의 계약이 깨어져버리면 모든 관계에 악영향이 끼쳐질 게 뻔했죠. 이런 구조로는 강대국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국왕은 자신에게 직접 충성을 하게끔 유도하고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군대의 힘도 키웠습니다. 만약 왕의 명령을 잘 안 듣는 지방 귀족이 있다면 바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더불어 주변국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국경 방어를 더 견고히 했습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모든 일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돈입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로 많은 돈이 필요로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필립 4세는 시민들과 귀족들에게 최대한 걷을 수 있을 만큼 세금을 걷어냈습니다. 그런데도 돈이 부족했습니다. 필립 4세는 어디서 돈 나올 데가 없나 하고 시선을 여기저기에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딱 여기에 한 곳이 걸렸습니다. 바로 가톨릭 교회로 말이죠.


20세기 초, 아비뇽을 바라보는 신사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교황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봉헌한 돈은 교황과 교회의 이름으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필립 4세는 이걸 잘 알았습니다. 교회의 곳간에는 셀 수 없는 돈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제 교회에게도 세금을 매겨서 그 돈을 쓸 수 있다면 프랑스는 더욱 강력한 국가가 되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프랑스 안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의 반응은 당연히 노발대발했습니다. 감히 교회를 건드려? 신성한 돈을 뺏는다고? 프랑스가 신성한 가톨릭 교회의 영역까지 침범할 줄을 몰랐을 겁니다. 교황은 온 힘으로 프랑스 국왕인 필립 4세를 비난하고 이단으로 내몰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프랑스 국력은 교황을 압도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교황에게도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처럼 끊임없이 국력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교황령이 정치, 외교, 군대, 영토 등 국가의 필수 조건을 갖고 있었음에도 교황의 위치는 정치적이기보다 교회의 수장이라는 역할이 더 컸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립 4세 /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뺨을 때리는 자코모 시욘나


  프랑스 국왕과 교황과의 갈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필립 4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교황보다 프랑스 국왕의 힘이 강력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지방 귀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황령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 Anagni 마을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쉬고 있었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납치합니다. 그 과정에서 교황은 뺨을 맞는 등 엄청난 치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이탈리아 귀족들이 교황을 구하긴 했지만 고령이었던 교황은 충격을 받고 곧바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프랑스는 이때다 싶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이 원했던 것, 바로 교회를 프랑스 발 밑으로 둬서 세금도 걷고 교황도 프랑스 사람으로 선출되게끔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아비뇽 유수의 시작

  프랑스는 교황 선출 과정인 콘클라베에 대놓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프랑스 사람을 교황으로 만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 단에는 프랑스 사람만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추기경들도 대거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콘클라베는 1년 동안 프랑스 추기경들과 이탈리아 추기경들 간의 갈등으로 시간이 흐르고 맙니다. 이윽고 추기경들은 그나마 중립적인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했는데 프랑스 사람이지만 추기경은 아니었던 베르트랑 대주교였습니다. 그는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합니다. 그런데 즉위식을 했던 장소는 로마 교황청이 아닌 프랑스 리옹이었습니다. 로마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프랑스에서 교황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반발이 심했겠죠. 프랑스에 대응해 새로운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여 교황령 귀족들은 탐탁지 않아했습니다. 중립적인 의미로 교황으로 선출된 클레멘스 5세는 역시나 중립적인 지역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땅이 아니지만 가까운 도시, 아비뇽 Avignon으로 옮겼습니다. 아비뇽은 이미 프로방스 귀족에 의해 교황 사유지로 관리되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권력은 땅을 찍고 있었고 아비뇽 바로 앞에 흐르는 론강 건너편엔 프랑스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가톨릭 교회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교회 재산에 관여하는 걸 피할 수 없었고 프랑스 출신 성직자를 추기경으로 대거 임명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교황의 아비뇽 유배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살았던 일곱 교황과 대립 교황


세계의 중심이 되어버린 아비뇽 주교좌성당

  어쩔 수 없이 아비뇽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 주변 마을을 일부 흡수하여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교황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비뇽엔 이미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주교좌성당을 비롯한 교회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곳이 교황에 의한 신도시로 출발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교황은 언제나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가 언제 다시 쳐들어와서 자신을 납치할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황청은 아주 높이, 성벽은 두껍게 지었습니다. 스스로 가두는 형태의 건물이 되어버렸지만 누구도 함부로 쳐들어 올 수 없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단단하게 지었습니다. 성당도 마찬가지로 크게 짓기보단 교황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게끔 증축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교좌성당을 교황이 거주하고 업무를 보는 교황청과 연결하여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또 성당 정문을 딱 한 개만 만들어서 쉽게 닫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미사 중에 누군가 침략해 온다면 성당 문을 바로 닫아버리고 교황청으로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거든요. 여하튼 주교좌성당을 포함한 모든 건물은 커다란 암벽 위에 우뚝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건물마다 두꺼운 지붕까지 올렸기 때문에 마치 여러 개의 돔(둥근 지붕)이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주교좌성당 이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도 이 성당을 아비뇽의 노트르담 데 돔 주교좌성당 Cathédrale Notre-Dame-des-Doms d'Avignon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돔들의 성모 마리아 주교좌성당이라는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교황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더해진 듯 보입니다.


아비뇽 주교좌성당


내가 만든 무덤에 내가

  성당엔 여러 기능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순간이 머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하고 또 묻혀야 하는 장소인 것이죠. 교황 또한 로마에 있었을 때는 시신이 안치되어야 하는 성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요한 라떼라노 대성전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는 교황의 시신을 로마에 안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아비뇽 주교좌성당이 바로 이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비뇽 시대의 두 번째 교황이었던 요한 22세는 주교좌성당을 증축하면서 자신의 관이 들어갈 자리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교황청을 옮겨서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교황의 마음이 미묘하고 복잡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아비뇽 주교좌성당은 교황의 눈물로 지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당에는 요한 22세와 그의 후임인 베네딕토 12세만 잠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황들은 죽어서도 아비뇽 교황청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무덤


아픔만 가득한 주교좌성당과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시대는 70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 사이에 7명이란 교황이 즉위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이었지만 언젠가 로마에 꼭 돌아가고 싶은 열망은 강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의 강한 입김으로 당선된 교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기 때문이겠죠.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 시대의 막을 내리고 1377년에 로마로 복귀했습니다.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인 카타리나 수녀는 교황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서 로마로의 복귀를 주장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황은 로마 교황청에 머물러야 하며 그 상징적인 자리 자체가 유럽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 땅은 빈집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교황이 없는 틈을 타서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까지 진격을 했고 이탈리아 귀족들은 분열되어 서로 이권을 놓고 다투기에 바빴습니다. 



  물론 아비뇽에서는 교황의 로마 복귀를 반대했습니다. 프랑스를 포함하여 아비뇽에서 새롭게 성장한 권력층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엄청난 일을 벌입니다. 로마에 있는 교황은 가짜라면서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대립 교황)을 선출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교황의 권력은 로마와 아비뇽으로 나눠지게 되었고 이른바 두 교황 시대로 한 세기를 살았습니다. 아픔으로 지어진 아비뇽 주교좌성당과 교황청은 교황이 로마로 복귀한 후에도 아픔으로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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