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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Oct 17. 2022

끊임없이 기도가 울리는 곳,
루르드 대성전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10

  만약 길을 지나가다가 정체모를 여인이 빛을 뿜으며 다가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또 불치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쾌차했다면 믿으시겠어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 우리는 가끔 내 삶에 기적과 같은 순간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기적은 희망을 가져다주는 빛줄기겠죠.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선 기적이 존재한다고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입니다. 물론 의사들의 과학적인 검증 등 엄청나게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교황이 최종 인정을 해야 하지만요. 피레네 산맥 자락에 위치한 루르드는 그 인정을 받은 마을입니다. 그래서 치유의 마을, 기적의 마을로 유명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모를레야 모를 수 없는 곳입니다. 


루르드의 저녁 풍경


  그래서 루르드 Lourdes엔 매일 저녁마다 기다란 초를 들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매일 똑같은 풍경이 보입니다. 사람들 손에 들려진 그 많은 초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상점에서 사기도 했을 거고 성당에서 마련한 기부함에 돈을 넣고 가져오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가져온 초에 불을 붙여 오밀조밀하게 서 있으면 어느샌가 어두웠던 밤은 물러나고 환한 빛으로 가득합니다. 아주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거기에 웅장한 노래까지 부릅니다.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등 같은 음에 여러 나라 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왠지 모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한 시간 동안 행진을 하고 나선 아주 큰 성당 앞 광장에 모여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하나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손엔 촛불을, 한 손엔 묵주를 들고 한알 한 알 굴리다 보면 어느샌가 기도의 막바지에 이르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게 루르드의 아주 평범한 저녁의 모습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또 바람이 세게 불어도 이 기도 행렬은 멈추지 않습니다. 과연 루르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희망의 기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 그리고 그 자리에 세워진 세 개의 대성전을 소개하겠습니다.




장작 주우러 갔다가 만난 여인

  루르드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유명한 마을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베르나데트 수비루 Bernadette Soubirous라는 소녀가 중심에 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루르드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극심한 빈곤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한 나머지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상태로 살았습니다. 병치레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프랑스 사람인데도 프랑스어를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죠. 그저 하루하루의 삶을 간신히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1858년 2월 11일 겨울, 베르나데트는 평소처럼 화로에 사용할 장작을 주으러 다녔습니다. 어느덧 마사비에 Massabielle 동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빛이 나는 걸 발견합니다. 그리고 동굴의 틈 사이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희고 긴 드레스에 푸른 띠를 두르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베일을 쓴 상태였습니다. 베르나데트는 너무 놀란 상태였지만 빛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이끌려 묵주를 꺼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마치자 여인은 사라졌죠. 호기심이 많았던 베르나데트는 수차례 그 동굴을 찾았습니다. 그 의문의 여인도 다시 나타났습니다.

 

성녀 베르나데트


  세 번째로 여인이 나타났던 날, 베르나데트에게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곳에 오기를 요청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때론 유령이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성모 마리아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어른들과 사제들 특히 베르나데트의 부모는 베르나데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혹세무민 하지 말라며 혼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자주 아프더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며 수군 거리기도 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사비에 동굴까지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이 함께 했다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베르나데트를 따라나서기도 했죠. 이 때문에 루르드 시에서는 동굴을 폐쇄하고 어린 소녀인 베르나데트를 감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데트는 의문의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매일 마시비에 동굴에 들려 여인을 만났으며 그때까지 총 18차례 만났습니다. 아홉 번째 만남 때는 여인이 베르나데트에게 또 한 번 요청을 합니다. “여기 있는 흙을 퍼내고 나오는 물을 마시고 씻어라.” 베르나데트가 그대로 행동했을 때 갑자기 맑은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열세 번째 만남에서는 여기에 성당을 짓고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열일곱 번째 만남에서 의문의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처음에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 베르나데트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누구시냐고 네 번째로 물었을 때 여인의 목소리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죠. “나는 원죄 없으신 잉태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마사비에 동굴


  베르나데트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동네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서 듣고 이해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 베르나데트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호칭은, ‘예수를 품었던 어머니인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죄가 없다’는 중요한 가톨릭 교리인데 이 어려운 신학적 개념을 겨우 열네 살 소녀가 알리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건 겨우 사 년 전에 교황청에서 발표한 교리였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는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처럼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기적, 즉 사적 계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위험했습니다. 루르드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교황청은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고 증언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2년 루르드 지역을 관할하는 타르브 교구 주교는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성모 마리아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선언합니다.




여인의 바람대로 세워진 세 개의 대성전

  루르드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타난 마사비에 동굴엔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타르브 교구는 성모 마리아가 요구한 것을 바로 시작하기로 합니다. 두 사람이 열세 번째로 만났을 때 오고 갔던 대화 내용 있었잖아요. 기억하시나요? 바로 성당을 짓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공사를 하려고 첫 삽을 뜨다 보니 가장 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건물은 평탄한 땅 위에 지어야 튼튼하게 지을 수 있고 건축비도 아낄 수 있는데 여긴 동굴이었거든요. 요즘 건축 기술로는 절벽에도 건물을 지을 수 있겠지만 백 년도 더 된 시점에서 어떻게 건물을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 당시 모든 건축 기술과 전문가를 다 모아서 성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암석을 다듬어 지반을 단단하게 하는 작업만 수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천문학 적인 건축비도 지불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루르드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건축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당 건축은 1862년에 시작해서 1871년에 마쳤습니다. 약 십 년간 이어진 것이지요. 성당 이름은 성모 마리아가 직접 자신을 소개한 호칭을 따왔습니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대성전 La basilique de l'Immaculée-Conception', 이게 이 첫 번째 성당의 이름입니다. 대성전은 루르드 어디에서도 보일 수 있게끔 높이 또 웅장하게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너무 튀지도 않고 그 동네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회색 돌을 이용해서 동네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게 했죠.


원죄 없으신 마리아 대성전


  동시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공간도 따로 마련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났던 마사비에 동굴에 야외 성당을 간단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처음 빛을 내며 나타났다는 동굴의 틈 바로 밑으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를 놓았고 그 앞으론 신자들이 앉아서 기도할 수 있는 의자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데트가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 기도를 했던 곳 등 그 흔적을 바닥에 새겼죠. 이 동굴은 '발현의 마사비에 동굴 La Grotte des Apparitions à Massabielle'이라고 해서 지금도 순례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입니다. 저도 좋은 기회에 이 동굴에서 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님 옆에서 미사를 보조하는 복사 역할을 맡았었는데 한 시간 동안 동굴 바로 안에서 머물 수 있었죠. 책으로만 봤던 내용을 직접 눈을 보니까 미사 내내 소름이 돋았고 어떻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을지 갖은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사 끝나고 나선 어떤 신자가 저에게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미사 내내 왜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그렇게 동굴이 좋았어?” 저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요!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동굴 틈을 찾느라 정신없었다고요!” 


  원죄 없으신 마리아 대성전과 마시비에 동굴을 짓고 나서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베르나데트가 만난 지 25주년이 되었을 때 새로운 성당을 하나 더 지었습니다. 마사비에 동굴 안쪽을 깊이 파서 첫 번째 대성전 바로 아래에 지하 대성전을 마련한 것이죠. 이름은 노트르담 드 로세르, 우리말로 하면 '묵주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La basilique Notre-Dame du Rosaire'입니다. 베르나데트가 성모 마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묵주기도를 했던 것처럼 루르드는 방문하는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더욱 열심히 바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두 번째 대성전은 입구부터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도 마찬가지로 온통 모자이크 천지입니다.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묵주기도의 스무 가지 주제를 표현한 것입니다. 제단에는 아주 중요한 말이 쓰여있습니다. '파 마리, 아 제수 Par Marie, À Jésus!'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에게로! 라는 뜻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엄연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가끔은 성모 마리아를 예수와 동급의 신으로 여기는 신자들이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 교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여하튼 묵주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이 완공되면서 지금의 루르드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두 개의 대성전 앞으로 큰 광장을 만들고 마치 신자들을 품어 안는 것처럼 회랑을 세웠죠. 바로 여기서 밤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묵주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내부 모자이크


  마지막으로 지어진 세 번째 대성전이 1958년에 지어졌습니다. 루르드는 워낙 작은 마을이고 곳곳에 언덕과 산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당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동굴과 멀게 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예 지하에 대규모 성당을 짓기로 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베르나데트가 만난 지 백 주년이 되던 해를 기념해서 말이죠. 성당 이름은 '성 비오 10세 대성전 Basilique Saint-Pie-X'으로 지었습니다. 성 비오 10세는 베르나데트가 살아생전에 재위했던 교황입니다. 그는 20세기 혼란스러운 세상 안에서 가톨릭 교회를 적극적으로 개혁한 인물입니다. 지켜야 할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악습과 폐단은 과감하게 버렸던 용기 있는 교황이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인 기도와 전례를 적극적으로 권유했습니다. 루르드가 이 교황의 이름으로 대성전을 지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루르드를 방문한 사람들이 점점 세속화되어가는 세상에 빠지지 말고 더욱 기도 생활과 미사 참여에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루르드에서는 가장 중요한 미사와 기도 행사를 성 비오 10세 대성전에서 하고 있습니다.




대성전에 새겨진 유일한 외국말

루르드는 더 이상 작은 마을이 아닙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성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 신자들도 꽤나 찾아가는 곳입니다. 특히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순례들 중 상당수가 종교를 불문하고 루르드 성지를 방문합니다. 건강하게 잘 걷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지요. 그런데 루르드 성지는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백오십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시죠? 먼저 루르드에 첫 번째로 지어진 원죄 없으신 마리아 대성전을 안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제단을 제외하고 양 옆 벽에는 대성전을 짓기 위해 기금을 봉헌한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새 성당을 지을 때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종의 전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당을 지을 때 신자들의 이름을 새겨서 벽을 채우고 또 그들이 기부한 기금으로 성당을 짓기도 했었습니다. 매일 미사가 거행되는 성당에 영구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그 벅찬 마음이 루르드 첫 번째 대성전에도 가득 새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참을 둘러보다 보면 이 이름들이 뚝 멈추고 웬 큰 대리석이 나옵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셩총을 가득히 닙우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한글입니다. 뜬금없이 우리말로 새겨진 글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라틴어로 이런 말도 쓰여 있습니다. 


"조선 반도의 선교사들이 바다에서 심한 풍랑으로 고생하던 중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구원되었음을 기념하며 서약에 따라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루르드 대성전에 이 석판을 설치한다. 1876년."
"COREANE PENINSULAE MISSIONARII DE ANGUSTIIS ET PERICULIS IN MARI GRAVISSIMIS IMMACULATAE MARIAE VIRGINIS AUCILIO EREPTI TANTI BENEFICII MEMORES IN BASILICA LAPURDENSI EX VOTO LAPIDEM HUNC IN SIGNUM PONI CURAVERUNT. MDCCCLXXVI."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이 스스로 세운 공동체이긴 하지만 프랑스 사제들이 교회의 골격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루르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리델 Félix-Clair Ridel 주교가 명동 주교좌성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루르드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고 매우 감격에 겨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임 주교였던 앵베르 주교가 1838년 우리나라를 원죄 없으신 마리아에게 맡기며 수호성인으로 선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원죄 없으신 마리아 교리를 선언하기 전이며,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리델 주교는 자신이 맡고 있는 조선 교회와 루르드가 오래전부터 깊은 관련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동료 프랑스 사제들과 조선 신자들을 기억하며 루르드에 석판으로 새긴 것입니다.


  대구에는 루르드 마사비에 동굴과 똑같이 생긴 곳이 있습니다. 바로 대구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성모당입니다. 대구대교구청 안에 위치한 성모당은 당시 대구 주교였던 드망쥬 Florian Demange 주교가 만들었습니다. 1911년 그는 대구의 첫 주교로 임명되자마자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교구의 기초가 되는 주교좌성당, 신학교, 교구청을 짓게 된다면 마사비에 동굴과 똑같이 만들어서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죠. 모든 소원이 이뤄졌을 즈음 성모당은 1918년에 완공됩니다. 또 다른 곳에도 루르드의 흔적이 있습니다. 충청북도 감곡 매괴성당 안에는 루르드에서 나타난 성모 마리아와 똑같이 생긴 동상이 있는데, 이 성당 초대 사제였던 부용 Camille Bouillon신부가 1930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국 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매괴 성당도 점령하여 사령부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기괴한 일이 일어나는데 인민군들은 성당에서 귀신 소리가 들리는 등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가 성당 한가운데에 있는 루르드 성모상이라고 생각하고 총을 막 쏴댔죠. 그런데 성모상은 전혀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렸고 깜짝 놀란 인민군은 불이 나게 성당을 비우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루르드에 뜬 무지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샘물

  루르드가 유명해지고 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비단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것뿐만은 아닙니다. 갑자기 땅에서 솟은 맑은 샘물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물을 기적의 샘물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물을 마시거나 씻는 행위를 통해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여러 번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 천 건의 기적 사례가 보고 되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단 70건만 인정했습니다. 기적에 의문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의사들이 의료와 과학을 이용해서 검증한 결과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1858년 카트린 Catherine Latapie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팔이 마비가 된 채 살고 있었고 당연히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웃 동네에 루르드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팔을 물에 담갔고 곧바로 근육이 이완되어 마비가 풀어졌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기적도 있었습니다. 베르나데트 모리오 Bernadette Moriau 수녀는 사십 년간 허리 통증을 앓고 하반신 마비로 살아왔습니다. 2008년 그녀는 루르드로 순례를 떠났고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샘물을 마시고 대성전과 동굴에서 기도를 바쳤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치유되기보다 환자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기도만 바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지탱해주던 의료 기구를 떼어내고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수년에 걸쳐 이 일을 면밀히 조사하다가 2018년 70번째 기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수 천 건 중 단 70건만 기적으로 인정받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루르드에 오면 샘물부터 찾아 마십니다. 목이 마르지 않는데도 그냥 물을 마십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마사비에 동굴 바로 옆에는 수십 개의 욕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엔 기적의 물이 담겨 있는데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몸을 담그고 나옵니다. 물론 남녀가 따로 분리되어 이용하고 있습니다. 기적의 샘물이라는 명성 때문에 한 시간은 기본이고 하루 웬 종일 기다리다가 몸을 담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잠깐 이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루르드에 사는 주민이라면 굳이 물을 사 먹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종교적이든 어떻든 루르드 주민들은 매일매일 기적의 물로 한 통 크게 받아가서 일상생활에 사용합니다. 언젠가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한 마디를 더한 적이 있었죠. “이 마을 사람들에겐 매 순간이 기적이겠네!” 하지만 루르드에서 마켓을 하는 사람들에겐 기적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가장 팔리지 않는 품목이 바로 생수니까요! 참 재미있는 일이죠?



  어쩌면 진짜 기적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쓰고 있는데 백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루르드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촉촉한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샘물은 지금까지 맑음을 유지한 채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기적이 뭐 따로 있나요? 기적을 찾아온 사람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등 루르드에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머금고 가는 밝은 표정도 기적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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