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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03. 2022

한번 주교좌는 영원한 주교좌!
남프랑스의 주교좌성당들

한 번만 알아보는 성당 이야기, 한알성당 #12

  제 글을 지금껏 읽어보셨으면 주교좌성당이 무엇인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간단히 말씀드리면, 주교좌성당의 주인인 ‘주교’는 교황이 임명한 가장 높은 성직자 품계(부제품->사제품->주교품)입니다. 교황이 더 높은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교황도 정확하게 따지면 주교품에 속합니다. 직무에 따른 구분 일 뿐입니다. 보통 주교는 교구의 행정구역을 감독하는 교구장직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교구장 주교만 앉을 수 있는 상징적 의자가 있는 성당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성당을 주교좌성당 Cathédrale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교구에 딱 한 개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성당입니다. 주교좌성당도 교황이 직접 지정을 하죠. 우리나라엔 대표적으로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가끔 한 교구에 주교좌성당이 여러 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니스 교구는 주교좌성당이 네 개가 있고 아비뇽 대교구엔 여섯 개나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럼 한 교구에 교구장 주교가 여러 명이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교황이 여러 성당을 한 번에 주교좌성당으로 지정한 걸까요? 모두 아닙니다. 


프랑스 주교좌성당 위치 지도. 빨간색은 현재 주교좌, 하얀색은 옛 주교좌

  한 교구에 주교좌성당이 여러 개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구가 사라져서 구역을 조정했거나 교구가 너무 성장해서 새로운 주교좌성당을 새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교좌성당은 교황이 한번 지정하면 철회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존에 쓰던 주교좌성당을 다시 일반 성당으로 돌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한 번 주교좌성당은 영원한 주교좌성당이라는 겁니다. 교구에 변화가 있더라도 주교좌성당은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주로 가톨릭 신자가 줄어든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교구를 통폐합하거나 구역을 재조정해 왔습니다. 특히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여러 번의 혁명을 겪으면서 많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프랑스의 첫 번째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도 교구가 꽤 있었습니다. 약 1800년 동안 교구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한 지역에 두 개 이상 되는 교구가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교구마다 주교좌성당이 있어야 하니까 주교좌성당 또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17세기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절반이나 되는 교구가 사라졌습니다. 다만 교구라는 행정구역만 없어졌을 뿐이지 주교좌성당 건물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죠. 오늘 이야기는, 남프랑스에 수없이 존재하는 주교좌성당들에 관한 것입니다. 너무 많아서 다 소개 못하고 우리가 알만한 도시를 중심으로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스 주님 탄생 주교좌성당 Cathédrale Notre Dame de la Nativité

  방스 Vence는 니스 Nice와 깐느 Canne사이에 있는 내륙 도시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방스보다 바로 아랫동네인 생폴 드 방스 Saint Paul de Vence가 더 유명할 겁니다. 두 도시가 남북으로 딱 붙어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방스가 더 오래된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곳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5세기 즈음에 생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곧바로 방스 교구로 지정되면서 그에 따른 주교좌성당도 짓습니다. 성당 이름은 주님 탄생 주교좌성당 Cathédrale Notre Dame de la Nativit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 지어진 성당은 작은 규모였지만 점차적으로 증축하면서 11세기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방스 교구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우 작은 교구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스 교구가 관할하던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굳건하게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아주 악재 같은 두 가지 법이 생깁니다. 성직자 기본법(1790)과 나폴레옹의 정교 협약(1801)입니다. 교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기 위해 많은 조항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교구 숫자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 150여 개에 이르렀던 프랑스 가톨릭 교구는 법에 의해 강제로 60개 이하로 줄었습니다. 이 와중에 오랜 시간 명맥을 유지해 온 방스 교구도 사라졌습니다.


방브 주교좌성당


  하지만 방스 주님 탄생 주교좌성당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남프랑스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관광객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 다니는 재미, 그러다가 길을 잃는 당황함, 또 정처 없이 걷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지중해 바다! 마치 숨어있는 보물을 찾는 것처럼 방스 골목을 걷다 보면 주교좌성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모습은 아니지만 마을 분위기와 소소하게 어울리며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지요. 남프랑스에서 숨어있는 보물을 찾는 것처럼 이 성당에도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보물이 있습니다. 바로 마크 샤갈의 모자이크 작품 ‘물에서 건치는 모세 Moïse sauvé des eaux’입니다.


  샤갈이 남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한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샤갈뿐만 아니라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프랑스에서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남프랑스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인 곳이었던 건 확실해 보입니다. 특히 니스가 아주 가까운 방스 지역은 다양한 색감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죠. 마을 건물엔 남프랑스 특유의 노란빛이 났고, 멀리 보이는 지중해엔 푸른빛이, 그리고 마을 바깥으론 우거진 숲이 초록빛을 내뿜었습니다. 마크 샤갈은 이 색감에 반했던 모양입니다. 방스 바로 아랫동네인 생 폴 드 방스에 집을 하나 얻어서 평생 작품 활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탄생 주교좌성당에 있는 샤갈의 작품은 이 알록달록한 색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한 색깔에 치우쳐 그림을 그렸던 그의 작품과 달리 이 모자이크에선 얼룩덜룩하지만 굉장히 조화로운 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에서 건치는 모세 / 마크 샤갈 작품



앙티브 주교좌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l'Immaculée Conception

  방스에서 지중해 쪽으로 내려가면 앙티브 Antibes라는 부둣가 도시가 나옵니다. 여기에도 주교좌성당이 있습니다. 원죄 없으신 마리아 주교좌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l'Immaculée Conception입니다. 이 성당이 속해있던 교구는 그라스 교구 Diocèse de Grasse였습니다. 주교좌성당 이름이랑 교구 이름이 다르죠? 교구 이름이 한번 바뀌어서 그렇습니다. 원래 앙티브 교구 Diocèse d'Antibe였다가 나중에 그라스 교구로 바뀌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있다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지역 가톨릭 역사가 살짝 복잡하긴만 매우 흥미롭습니다.


앙티브 주교좌성당


  앙티브 주교좌성당은 지중해 해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성당 자리는 로마 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남프랑스의 대부분 성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신전을 무너뜨리고 성당을 지은 것이죠. 또 하나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 승천 이후 지중해 유역을 돌아다니며 선교를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직제자는 아니지만 훗날 사도로 불리게 되는 성 바오로입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후 회개하여 그리스도교를 앞장서서 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열정이 앙티브까지 미쳤습니다. 바오로가 스페인을 가려는 도중 여기에 들려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4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여기에 들렸다고 전해집니다. 헬레나는 매우 신앙이 깊었던 인물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그리스 등을 돌아다니며 예수와 관련된 유물을 수집했습니다. 그 여정 중에 그녀는 앙티브에 들려 가장 높은 자리에 가루프 경당 Chapelle de la Garoupe 을 지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앙티브 주교좌성당 내부


  이렇게 유서 깊은 도시에 주교좌성당이 빠질 수가 없을 겁니다. 앙티브 교구는 450년에 지정되어 곧바로 원죄 없으신 마리아 주교좌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위치가 너무 좋은 탓(?)에 지중해에 출몰하는 해적들에 의해 여러 번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1124년 사라센(아랍계) 해적들로 인해 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물론 신자들과 여러 귀족들에 의해 성당을 복구하는데 힘썼지만 해적들의 출몰까지 막을 순 없었습니다. 복구하면 파괴되고 또 복구하면 파괴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앙티브 교구 주교는 교황청과 협의하여 주교좌성당을 더 내륙으로 옮기기로 합의하기에 이릅니다. 칸느에서 북쪽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산간 동네 그라스 Grasse로 옮긴 겁니다. 동시에 교구 이름을 그라스 교구로 바꾸고 주교좌성당도 새로 짓습니다. 하지만 앙티브 주교좌성당이 완전히 파괴된 건 아니기 때문에 그라스 주교좌성당을 주 성당으로, 앙티브 주교좌성당을 공동 주교좌성당으로 지정하여 사용했습니다. 파괴와 재건을 반복한 앙티브 주교좌성당이지만 그 안에 있었던 예술작품은 아주 건재합니다. 특히 1513년에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그린 그림은 신자들이 떼서 보호를 했다가 다시 설치했던 노력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목각 작품상도 있습니다. 예수가 죽은 이후 무덤에 시신을 안치했을 때 장면을 조각한 목각상입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프랑스혁명 때 또 한 번 파괴된 주교좌성당 잔해 밑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1801년까지 그라스 교구 소속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01년 아주 익숙한 연도죠? 예, 방스 주교좌성당처럼 교구 감축 정책에 의해서 그라스 (앙티브) 교구는 사라지고 주교좌성당만 지금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아를 생 트로핌 주교좌성당 Cathédrale Saint Trophime d’Arles 

  앞에 소개했던 두 주교좌성당은 원래 속해 있던 교구가 사라지고 주교좌성당으로서 기능도 상실한 채 그저 이름만 이어오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주교좌성당이 있었다 정도인 것이죠. 그러나 아를에 있는 생 트로핌 주교좌성당 Cathédrale Saint Trophime d’Arles은 원래 속해 있던 교구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교좌성당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먼저 아를이란 도시에 대해서 조금 알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를 Arles


  아를은 아비뇽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론강 하구에 있는 가장 큰 도시로서 로마시대부터 가장 번성한 지방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로마시대 경기장과 야외극장, 공중목욕탕 등을 보면 먼 옛날부터 어마어마한 곳이었다는 건 의심할 수 없습니다. 아를은 종교적으로도 프랑스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한 가톨릭 도시입니다. 여기엔 일찍이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고 교구를 형성하여 큰 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생트 마리 드라 메르가 매우 가깝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생트 마리 드라 메르는 제가 지난번에 소개해 드린 것처럼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 도착한 곳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트로핌이라는 사람이 아를에 도착해서 그리스도교를 적극 전파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트로핌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이거나 베드로 사도를 이어 2대 교황으로 즉위한 파비아노 교황이 보낸 선교사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확실한 지는 알 수 없습니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서 제대로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건 트로핌은 아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긴 했습니다. 아를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고 훗날 트로핌을 기억하는 주교좌성당이 지어졌으니까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뿜뿜 내보이고 있던 아를은 교황에게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지역 공동체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성직자 회의라고 할 수 있는 공의회도 여기서 두 번이나 열었습니다. 


  아를 교구 Diocèse d'Arles도 프랑스혁명의 바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1801년 교구 재조정을 통해 역사적 한 편의 기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를 교구의 역사적, 사회적 영향을 인정받아, 아를 주교직만은 없애지 않았습니다. 교구는 없어졌는데 교구장 자리는 있다? 참 아이러니한 모습이긴 합니다. 어찌 되었건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회는 엑상프로방스 주교가 아를 주교직을 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엑상프로방스 교구는 즉시 이름을 엑상프로방스-아를 교구 Diocèse d'Aix-en-Provence et Arles로 바꿔서 지금까지도 엑상프로방스에 상주하는 주교가 아를까지 관할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아를의 주교직 덕분에 생 트로핌 주교좌성당도 이름만 주교좌성당이 아닌, 그 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를 주교좌성당 내부와 주교좌


  그런데 아를 주교좌성당은 엄청 오래된 성당이 아닙니다. 교구 역사에 비해 겨우(?) 12세기에 지어졌습니다. 원래 5세기에 지어진 초창기 주교좌성당(옛 이름, 에티엔 주교좌성당)을 허물고 다시 지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를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아를 주교는 프랑스 왕실에까지 힘을 뻗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를 주교좌성당을 지을 때 성당만 떡- 지은 게 아니고 그 옆으로 각종 관청, 사무실, 주교관, 성직자와 직원들 숙소를 전부 지었습니다. 일종의 가톨릭 종합 센터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건축 양식도 로마네스크 양식을 도입해서 가장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끔 했습니다. 특히 주교좌성당 입구에 있는 아치형의 조각들은 입을 떡 벌리게 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대부분 이야기를 조각했습니다. 얼마나 세밀하게 표현했는지 얼굴만 봐도 감정이 느껴질 정도죠. 아를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생 트로핌 주교좌성당 입구를 보고 너무 놀라며 동생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엄청 감탄하고 있는 고딕스러운 정문이 있어. 생 트로핌 주교좌성당의 정문이야. 그런데 오우, 이 아름다운 조각들이 중국 악몽처럼 얼마나 잔인하고 기괴한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아.
(1888년 3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중)


아를 주교좌성당의 정면 모습과 정문 조각들


  또한 아를 주교좌성당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아를 순례길의 시작점입니다. 아를 길 Chemin d’Arles은 프랑스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대표적인 순례길입니다. 생장 피에트 포르 마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라는 도시를 거쳐 프랑스 길이랑 합쳐집니다. 요즘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아를 길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길을 재정비하여 사람들이 웬만해선 아를 길을 이용해서 산티아고로 향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를 주교좌성당엔 순례자 센터를 설치하여 많은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아를의 영광을 다시 이어나가려는 노력이 가상해 보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교회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교구 재조정은 최근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정부에 의해서 재조정하는 게 아니고 시대적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1966년에는 수도권 인구 과밀화 현상을 해결하려고 파리 교구를 여러 교구로 나눴습니다. 새로운 교구들이 여럿 탄생하면서 새로운 주교좌성당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2010년에도 다시 한번 교구를 재조정했습니다. 신자수가 많이 줄어서 도저히 독립된 교구로 두기엔 관리가 어려웠던 이유에서였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주교좌성당 지위를 잃은 곳도 있고 혹은 공동으로 주교좌성당 지위를 유지하는 곳도 생겼습니다. 이처럼 가톨릭 교구는 지금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또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주교좌성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번 주교좌성당은 끝까지 주교좌성당입니다.


2015년에 지어진 파리 근교, 크레테일 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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