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곰 Nov 19. 2022

갈대 같은 순례자 마음

#8

  순례길을 하나로 잇는 건 다름 아닌 ‘다리’가 아닐까 싶다. 실개천부터 큰 강까지 중세 때 순례자들을 위해서 지어놓은 아름다운 다리가 즐비하다. 뿌엔떼 라 레이나에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큰 다리가 있다. 순례자들을 존중했던 한 여왕이 지어놓아서 ‘여왕의 다리 Puente la Reina’라고 불린다. 이 이름은 곧이곧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조그만 다리를 건널 땐 모르겠지만, 큰 다리를 건널 땐 왜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뿌엔테 라 레이나


  오늘 아침처럼 내 두 다리의 첫 발걸음을 여왕의 다리로 시작했을 땐 더 남달랐다. 종교 전통에서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강)을 가로지르는 것, 물이 쓸려나간 곳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난다. 더러운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다 휩쓸어간다. 깨끗하다고 여겨지는 상태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해준다. 


  나에게서 휩쓸려 간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다가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험했고, 날씨도 안 좋았으며, 하루에 걸어야 하는 거리가 꽤 길었던 탓에 1분에 수없이 한 숨을 내뱉었던 나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순례길을 시작한 나를 자책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상쾌함을 느꼈다. 알베르게 대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쐴 때 차가운 공기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모른다. “에효- 오늘도 가야 하네”가 아니라 “그래- 오늘도 파이팅이야"였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아침에 만난 어떤 한국인 중년 부부와 대화를 나눴을 때다. 으레 그렇듯이 오늘 얼마큼 걸어야 하는지, 또  얼마큼 시간이 걸릴지 얘기를 나눴는데, 아저씨가 에스떼야 Estella까지 대충 20km에 4시간 반 정도 걸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 겨우 그것밖에 안 걸어요?


  나도 모르게 뱉은 말에 모두들 하하하 웃고 말았다. '20km 밖에'라니? '4시간 반 밖에' 라니? 나 스스로도 참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 이만큼 거리를 걸을 일이 없었을뿐더러, 그러고 싶은 마음은 단 좁쌀만큼도 생겨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껏 하루하루 걸어온 순례길의 거리가 굉장했고 높낮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오늘 걷는 거리는 ‘겨우'라고 말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던 것 같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다면 뭘 할까, 무엇을 먹을까, 얼마큼 더 잘 수 있을지 등 평소보다 더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순례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 바람이 이렇게 불면 기쁘게 맞이하다가도 저렇게 불면 왜 그렇게 부는지 이해 못 하는 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일상인가 보다.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느낀 것도 잠시, 다른 것에 불만 폭풍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날씨였다. 너무 더웠다. 땀이 날려는 순간 증발해버려서 온 몸엔 하얀 소금 자국이 생겨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 신발을 봐도 분명 며칠 전에 눈 속을 헤매고 눈밭에 빠졌던 내 발이 맞았다. 그런데 오늘은 마른 땅바닥과 초록빛 나는 숲을 지나 나아가고 있다.


유채꽃밭이 있는 순례길


  C.S 루이스가 쓴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라는 소설(훗날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로 영화화 되었다)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러 옷장 속에 들어갔다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데 순간적으로 따뜻한 마을에서 추운 겨울 나라로 이동한다. 이 책은 어린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켰었다.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으니까 누구도 말리지 않고 제한조차 없는 상상을 끊임없이 이어나갔었다. 


  하루아침에 날씨가 확 바뀌어버린 상황에서, 나는 어쩌면 C.S 루이스의 소설 주인공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 상상만 하던 그 세계를 실제로 맞이하려니 혼돈에 혼돈이 뒤엉켜 무엇이 현실이고 상상인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아, 생각해보니 아침에 건너온 뿌엔테 라 레이나 마을의 큰 다리가 옷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는 기존의 불평을 잊어버렸고 새로운 불평을 맞이했다. 또 뼛속까지 으스러질 정도로 추위를 겪었다가 이제는 땀을 뻘뻘 흘리는 햇빛 속에서 길을 걸었다. 현실이 현실 같지 않기에 분명 현실이 소설이라고 믿고 싶었다. 


에스떼야 Estella


  하긴, 되돌아보면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현실적이지 않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아니, 지지난주 일요일만 해도 나는 산티아고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다. 불만을 버려도 불만이 생기고 추우면 다시 더워지고, 지금 이 길을 걷다가도 또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대체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