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면서
2023년 8월 6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주 큰 소식이 전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7년 세계청년대회 차기 개최지로 서울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교황의 발표 1년 전부터 서울대교구 사제들과 함께 서울에 세계청년대회를 유치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왔다. 2013년부터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했던 경험을 가지고 한국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나누려고 노력했다.
세계청년대회는 사실 잘못된 번역 이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유엔의 세계 청년의 해(1985년)에 맞춰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교회도 이 운동에 동참하고자 전 세계 청년들을 바티칸에 초대했다. 그에 대한 응답은 무척이나 열광적이었고 교황은 1986년부터 세계 젊은이의 날(World Youth Day, WYD)을 제정하여 매년 주님수난성지주일(종려주일)에 지내게 했다. 부활 1주일 전에 이날 보낸 이유는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보냄과 동시에 그 구원의 대상이 바로 우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교회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바쁜 주간에 특별한 날을 보내면 사목적 혼선이 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유스(Youth)라는 영문이 청소년으로 번역되어 청소년과 청년들을 다 아우르지 못한 채 5월 마지막주 '청소년 주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젊은이의 날의 날짜를 11월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옮겼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왕으로 모시면서 본인 또한 교회의 주체(왕)로 살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도 세계 젊은이의 날이라는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의 청소년 주일을 11월로 옮기는 게 아니라 새로 제정을 하고 말았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이 따로 세계 젊은이의 날을 보내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년 각 나라에서 세계 젊은이의 날을 보내면서도 가톨릭교회의 보편 일치성을 강조하기 위해 2~3년에 한 번씩 한 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국제적 차원에서 이날을 지내기로 한 것이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원래의 날짜에 맞춰서 주님수난성지주일에 하루이틀 정도만 국제적 차원 세계 젊은이의 날을 보내다가 점차적으로 사람이 많아지자 날짜를 옮기게 이르렀다. 젊은이들이 최대로 모일 수 있는 여름 방학 때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 또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국제행사로만 인식하기에 이른다. 결국 '세계청년대회'라는 이름을 붙여 행사적 성격만 강조하고만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세계 젊은이의 날(World Youth Day)을 세 개로 쪼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2027년 서울대교구는 세계 젊은이의 날 국제적 차원의 이벤트인 세계청년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는 유교적 사고방식과 더불어 종교특유의 성직주의에 깊이 젖어있는 상황이다. 성직자가 교회의 우두머리이기에 시골 작은 성당에서조차 사제는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요즘 세대에는 반감이 들 수밖에 없는 행태나 다름이 없다. 사제의 오만한 모습과 잘못된 행태는 곧잘 젊은이들의 꾸짖음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똑똑한 사제는 그 성직주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상황이라 그 꾸짖음을 성직과 교도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가톨릭교회, 특히 서울대교구는 세계청년대회를 잘 치를 수 있을까?
행사는 잘할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그동안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해온 행사에서 봉사자들은 한 번에 사용되어 버려지는 신발이나 다름이 없었다. 필요할 때 그 능력을 교회의 이름으로 빼앗아 쓰다가, 행사가 끝나면 필요가 없으니 모른 체 하고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아직 그 모습은 한국 가톨릭교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세계청년대회는 과정이 중요하다. 교회의 젊은 리더로 성장하고, 각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며 신앙적으로 성숙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사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동안 잘못된 행태를 과감히 버리고 평신도의 쓴소리를 달게 받아들여서 쇄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등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특출 난 거 없는 평등한 존재다. 사제, 수도자, 일반 신자 가릴 것 없다. 단지 직무에 의해서 각자에게 맞는 부르심을 받았고, 특히 사제는 아주 소중한 부르심을 받아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사제가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한 존재다.
경청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심어주셨다. 내가 받은 달렌트, 다른 사람이 받은 달렌트는 모두 성령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건 어쩌면 하느님의 뜻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비단 이것은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높이 솟은 우월적 사고와 수직적 관계,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신의 잘남을 강조하는 모습을 무너트릴 수 있어야 한다. 꼭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관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 곳곳의 리더가 되어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