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장:입국

by Grey

필리핀은 낯익은 풍경이었다.
몇 번의 여행으로 스친 계절이
내 몸속에 미세한 맥박처럼 남아 있었고, 괴리감마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무게는 그 모든 익숙함을 낯설게 만들었고,
혼자라는 사실은 풍경 너머 나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공항 문이 열리던 순간,
거대한 어둠이 환한 빛을 가르는 틈을 만들었다.
밤공기 속에 떠도는 것은 바람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깊은 호흡을 들이켰을 때,
이국의 습한 공기가 폐 속에 스며들면서 내 몸 구석구석을 검은 물결처럼 적셨다.
캐리어 바퀴는 이어지는 파도처럼 천천히 굴러갔고,
내가 이 도시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택시 안.
에어컨 바람이 팔을 스치고, 낮게 깔린 팝송이 내 귓가를 부드럽게 렸다.
창문 너머로 스쳐 가는 건물들은 반쯤 환하게, 반쯤 어둡게 환영의 불빛을 뿜어냈다.
익숙함이란 둔탁한 장막처럼 내 앞에 있지만, 그 막 안쪽에선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빠득빠득하게 돌아가는 회전문, 정해진 순서대로 오가던 행인들, 미동 하나 없이 서 있는 그림자들이 나를 주시하는 듯했다.

황금빛 간판이 하늘로 빛을 토해 내면,
그 아래는 더 깊이 내려앉은 어둠이 자리 잡았다.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들이 벽에 기대어 멍하니 거리를 응시했지만,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해 있었다.
그들 틈에 섞인 나는, 시선을 숨긴 채 내 안의 불안을 꺼내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파사이의 방은 냉랭했다.
낡은 목재 바닥 위에는 표백제 냄새가 은은하게 깔려 있었고,
물 한 컵을 들이켰을 때 입안에 남은 맛은 씁쓸한 기억처럼 오래 맴돌았다.
쇼파에 기댄 채로 마음속에 떠도는 한 문장을 붙잡아 보았다.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
그러나 그 문장은 천장 위 어딘가를 떠돌 뿐, 땅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며칠간 나는 도시를 유영했지만,
도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통과시키기만 했다.
포블라시온의 골목길엔 은퇴한 서양인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고,
그 공허함은 마치 오래된 맥주잔 속 거품처럼 금세 사라져 버렸다.



오카다, COD, 리월마, 뉴코스트
카지노의 회전문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또 나왔다.
잘 다려진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반짝이는 장신구를 뽐내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빛나는 외피 아래 눈동자는 메말라 있었다.



BGC로 향하는 길, 유리창에 부딪힌 달빛이 산산이 부서지듯 반짝였다.
높이 솟은 빌딩들 사이로 비친 달은 찬란했으나,
그 곁에 선 사람들의 얼굴은 얼어붙은 풍경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팔목 위에서 애플워치가 간헐적으로 점멸할 때마다,
삶이 흘러가는 속도가 오히려 멈춰 버린 듯했다.

이 도시는 낮보다 밤이 더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빛이 풍성했지만, 그림자는 절대 부피를 잃지 않았다.
마카티의 마천루와 베니스몰 수조, 마닐라베이의 검푸른 물결은 모두 이 도시에 숨겨진 얼굴들이었다.

나 역시 그 얼굴 중 하나로 섞여 들어갔다.



지도 위를 헤매듯, ‘어디쯤이 살 만할까’를 반복해서 그려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지도보다 잔인했다.
이곳은 동남아의 흔적을 지녔으나, 물가는 한국보다 높았고, 중산층의 중간 지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극과 극 사이를 넘나들며, 비전(秘傳)이라도 된 듯 각자의 생존 방식을 은밀히 지켜 내고 있었다.

나는 이 도시를 ‘살아본 자만이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왔고,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지점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번엔 다를 거야.’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에게 던진 다짐들은 깨지는 유리처럼 가느다랗게 흩어졌다.



밤의 도시가 반짝이는 사이, 나는 그 화려함에 삼켜졌다.
빛 아래에서는 누구나 빛나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끝없이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알지 못했던 진짜 시작은 이 순간부터였다.
무너짐은 지옥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지옥의 입구였다.
익숙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방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 모든 절망과 희망의 경계가 흐려지는 틈 사이로,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너머가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느낄 수 있었다.
내 삶의 새로운 장이 아직 잉크를 머금은 채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잉크는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