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장:침잠의 방

by Grey

밤의 장막이 내리면,

마닐라의 어둠은 더욱 대담해졌다.
네온 빛이 흐트러진 유리 파편처럼 바닥 위를 헤집고,
음악은 귓가에 낮은 속삭임 대신 무거운 망치질이 되어 박혔다.
젖은 아스팔트에 부딪힌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고,
그 틈을 비집고 술 냄새와 가벼운 욕설이 뒤얽혔다.
나는 그림자처럼 그 소용돌이 속을 천천히 미끄러지듯 걸었다.
어떤 감정도 더해질 필요 없이, 그저 그 흐름 속에 녹아들 뿐이었다.



포커 테이블 위에서는 서늘한 시선이 빛났고,
칩들이 맞부딪칠 때마다 청명한 소리가 어둠을 뚫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저물고 마지막 칩이 지폐 다발로 바뀌는 순간, 나는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손끝에 남은 떨림마저 흐릿한 추억으로 바뀌었을 때,
포커는 더 이상 삶의 이유가 아닌,
끝없이 되풀이하는 노동일뿐이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마지막 믿음조차 그것이었을 뿐,
나를 붙드는 끈은 이미 풀려버린 뒤였다.

숙소에 돌아오면, 어둠 아래 천장이 축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방이 주는 맹목적인 침묵은 아무리 견디려 해도 무겁기만 했다.


문득,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을 밀자
사진첩이 켜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과거의 조각들.
전역하던 날의 환한 미소, 거울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빛,
생일촛불 앞에서 세계를 잊던 그 모습. 내가 주인공이었던 작은 승리의 순간들까지.
모두 무덤덤하게 나열된 사진들은
지금의 나와는 닿지 않는 거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했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파노라마처럼
조각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움직였다.

멈춰 있으면
그 잔재들이
나를 찔렀다.



다시 거리로 나서자,
말라테의 밤은 온몸으로 외쳤다.
네온 빛은 물결처럼 고비마다 출렁였고, 어디서나 잔향이 꿈틀댔다.
어느 술집, 어떤 클럽이든 비슷하게 요란했지만, 나는 그 소음에 동화되려 애썼다.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스친 이들과 웃었고, 지나친 술잔을 비우며, 기억해야 할 것과 잊어야 할 것 사이를 표류했다.

다음 날이면, 이름도 모를 여자가 옆에 누워 있었다.
그 얼굴은 전날과 달랐고, 감정이 묽게 풀려버린 방에서는, 무엇도 진실이라 할 수 없었다.
서로의 체온마저 낯설던 순간,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과거의 환상을 잊기 위해, 나는 몸을 비틀며 이불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포커 칩을 집어 들던 손가락은 이제 침대 이불을 움켜잡았고,
카드 더미를 들춰보던 눈은 천장 너머 어둠을 응시했다.
돌아가야 할 무대도, 지켜야 할 이상도 사라졌다.
플레이 기록도,
게임의 분석도,
총명하던 눈빛도,
차츰 줄어들었고, 나는 그것조차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몰락은 한순간의 폭풍이 아닌, 금이 서서히 번져가는 과정이었다.
작은 게으름이 균열을 틔우고, 그 틈새로 스며든 허무가 모든 것을 저미듯 말라붙였다.

나는 그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이유도, 의지도 부재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또 한 발.
네온이 비출수록 나는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지옥의 문은 소리 없이 열렸고, 나는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끝없이 번지는 어둠 속에서,
나는 과거의 빛을 그리워하며 계속 걸었다.
돌아올 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