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3장:마음의 끝

by Grey

※ 이 글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독과 붕괴의 기록입니다.
중독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감정적으로 불편할 수 있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방 안엔 몇 사람이 있었다.

맥주 깡통은 식었고, 반쯤 비워진 과자 봉지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기대어 구겨져 있었다.
스피커에선 오래된 노래가 흘렀다. 목소리는 있었으나, 대화는 없었다.
그저, 시간이 머무는 밤이었다.

그때,
익숙한 손이 작은 손짓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바닥 위엔 분홍빛의 조각 하나.

그것은 딱히 반짝이지도, 흐르지도 않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각도도 그림자도 맺히지 않는 무언가.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이라기보다, 방향 없는 몸이 자연스럽게 기운 쪽이었다.
입 안에 넣고, 삼켰다. 거창한 감정은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몸이 가볍게 흔들렸고, 공기에는 낯선 무게가 얹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은
비틀렸고,
세면대에 몸을 기댔을 때,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게 부서졌다.
표정은 물처럼 번졌고, 경계는 사라져 있었다.

헛구역질.
텅 빈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무릎이 꺾이고, 식은땀이 맺힐 즈음,
세상의 경계가 터졌다.

음악은 어디선가 찢겨 흘렀고, 천장은 출렁였다.
생각은 미끄러졌고,
시간은 어딘가에서 끊어졌다.
눈앞의 조명은 부드러웠고, 공기는 피부를 쓰다듬듯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세상은 무너진 채로 부드럽게 반짝였고, 내 마음은 천천히 열렸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작은 환각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
다 괜찮을 거라는
거짓된 확신.

그리고 모든 게 희미해진 뒤에도, 나는 웃고 있었다.
마치 상처 같은 것이 애초에 없었던 얼굴처럼.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이자, 끝이 사라지기 시작한 날.

처음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파란 약, 빨간 약.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삼키고 싶었다.
현실은 지겨웠고, 고통은 지루했고,
버티는 일에는 더 이상 마음이 없었다.
그날의 분홍빛은 선택이 아닌,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수순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나는 빨간 약을 삼켰을 것이다.
비참했지만, 덜 외로운 쪽.
그건 쾌락이 아니었다. 생존을 닮은 침잠이었다.
나는 그 안으로 저항 없이, 느리게 스며들었다.

그 안은 모든 것이 멎어 있는 장소였다.
고통은 여전히 있었지만, 둔했고, 무해했다.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가 가장 빛나던 시절의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그 자리에 갇힌 채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붙잡기엔
손끝의 감촉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저, 숨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감각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무언가가 천천히 나를 삼켜갔다.

그건 극적인 파열이 아니라,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마음의 끝이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무언가.
그게 진심이었는지,

단지 오래된 기대였는지는 이젠 알 수 없었다.
그것마저 그 밤엔 소리 없이 잠겨갔다.

그리고 그 밤 이후,
나는 다시 어떤 감정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

그건 끝이 아니라,

끝이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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