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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균 May 11. 2024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유재하, <가리워진 길> 中


시대와 형식을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은 인생을 '길'에 빗대어 노래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수 유재하의 곡 <가리워진 길>도 그러한 예시 중 하나다. 각자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서로 다른 표정과 걸음으로 나아가는, 때로는 가까워보이고 때로는 아득한 듯한 길의 심상은 삶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한 보조관념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에게도 그러한 '길'이 있었다. 1890년 봄, 고흐는 생 레미의 병원에서 정신질환이 치료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퇴원해 파리 북쪽의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로 향한다. 이 곳에서 10여 주를 보내는 동안 반 고흐는 약 70점의 작품과 30점의 드로잉을 남기며 생의 마지막 창작열을 불태운다.

Vincent van Gogh, <Wheatfield with Crows>, 1890, oil on canvas, Van Gogh Museum.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까마귀가 있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두터운 유화 물감으로 강렬하게 표현된 짙푸른 밤하늘은 점멸하는 두 개의 창백한 빛을 품고 있고, 그와 대비되는 금빛의 밀밭은 하늘과 맞닿아 나부끼고 일렁인다. 하루에 3.5프랑을 내고 묵던 여인숙 주인에게 빌린 총으로 쫓아낸 까마귀 떼는 V자의 대형으로 밀밭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화면 전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하단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세 갈래의 아득한 길이 화면을 분할한다.


특유의 세찬 질감과 짙은 색채는 반 고흐의 광기와 혼란, 그리고 극적인 죽음과 맞물려 보는 이로 하여금 화면을 채운 각 요소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끈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세 갈래의 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닿을 곳 없이 이어진 길은 삶의 끝에 다가서는 심경에 대한 은유 내지는 자살의 징후로 해석되었다. 이 그림이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오해가 퍼진 것도 그 소산일 것이다.

Van Gogh's Letters. Van Gogh Museum.

하지만 반 고흐는 이 시기 동생 테오 부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면서도, '(이 그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원의 건강함과 풍요로운 힘을 전해줄 것'이라고 덧붙이며 가능한 한 빨리 파리에 가서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희망을 담았다.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구름 낀 하늘 아래 밀밭 풍경(Wheatfield under Thunderclouds)>에 담긴 웅장한 풍경과 밝은 색채 또한 음울함의 극에 도달해가는 예술가라는 고정관념에 자칫 가려지기 쉬운, 자연에 대한 그의 동경과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의 화폭을 채운 임파스토의 거센 질감에서 생에 대한 의지와 분투의 열정이 읽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리워진 길>에서 아득함과 외로움을 대면하고 '힘이 되어달라'고 외치는 화자처럼, 사망 직전 2-3주 간의 기록에 따르면 반 고흐 역시 혼란 속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보인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그의 입체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시각예술을 통해 정서를 전달하고 한편으로는 공감받기를 원했던 그에게로의 길을 터주는 첫 걸음이 아닐까.


References

1. Blumer, D. (2002). "The Illness of Vincent van Gogh."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59(4): 519-526.

2. Harris, J. C. (2002). "The Starry Night (La Nuit Etoilée)." 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 59(11): 978-979.

3. Vincent van Gogh, "Letter to Theo van Gogh, written c. 10 July 1890 in Auvers-sur-Oise", translated by Johanna van Gogh-Bonger, edited by Robert Harrison, letter number 649. Retrieved 24 Jul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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