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서 좋은 우리

by 진담





결혼 13년 차, 동갑내기 커플인 우리는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웃자고 한 이야기에 자주 다큐멘터리를 찍는 나와 달리 남편은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장거리 여행을 가기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데, 남편은 여행 전날 밤이 되어서야 "아, 이젠 짐을 좀 싸야겠다"며 주섬주섬 캐리어에 옷을 담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변수나 실수 앞에서도 그는 서두르거나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뿐인가, 장소를 불문하고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곧장 꿈나라로 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게 뭐 대수야. 세상 안 무너져'' 다.


나는 그런 남편이 조금 부럽고 여전히 신기하다.






회사가 인수합병 절차를 거치며 조직 개편과 인원 감축 이야기가 한창 돌고 있을 무렵이었다. 남편이 밤마다 멍한 표정으로 웹툰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갑자기 웬 웹툰? 의아해하다 문득 잊고 있었던 남편의 습관 하나가 떠올랐다. 마음이 심란할 때면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리를 비우곤 했었던 것이다.


아들과 실없는 장난을 치거나, 지칠 줄 모르고 아재 개그를 날리던 남편은 며칠 새 말수도, 웃음도 줄어들었다. 주말이면 함께 보던 TV방송 앞에서도 정적이 흘렀다. 눈치 빠른 아들이 너스레를 떨며


"아빠, 우리 저거 먹어 봤잖아, 진짜 맛있었는데. 맞지?'' 하며 말해도


"그러게''라는 짧고 건조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 모습을 며칠 지켜 보던 내가 그날 밤 말했다.


"그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았잖아. 그럼 된 거야. 그럴 일도 없겠지만 회사 잘리면 그동안 못 잤던 잠이나 실컷 자고 여행이나 가자. 그리고 그게 뭐 대수냐, 세상 끝장날 것 같은 일도 지나고 보면 별 거 아니야."


이번엔 내가 '세상 안 무너져' 정신을 발휘할 때였다. 우리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 보자, 만약 원치 않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될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이었다. '초긍정주의자'와 함께 살아온 세월 12년. 어느새 그의 말을 내가 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다행히 우리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은 웹툰 보기를 멈췄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남편표 개그도 다시 시작되었다.


저녁 무렵,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추워진 날씨 탓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일을 마친 후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저 멀리 남편이 늘 타고 다니는 빨간색 광역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어 서는 게 보인다. 퇴근 시간이 궁금해 전화를 걸어 보려는데 익숙한 그림자가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남편이다.

아니,이런 우연이 있나. 반가운 마음에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연신 흔들어 본다.


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에 이내 웃음이 번진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가자, 딸기 사러!"


"좋다! 안 그래도 딸기 먹고 싶었는데."


다른 거 투성인 우리에게도 공통분모는 있다. 그건 바로 '딸기'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딸기를 잔뜩 사서 마음껏 먹는 게 내 꿈이야. 웃기지?'' 말하며 천진하게 웃던 대학생은 어느새 군데군데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지만, 딸기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싸울 때 썼던 체력과 열정이 빠져나간 자리엔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우리는 딸기를 사기 위해 나란히 걷는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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