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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Nov 29. 2023

런던베이글의 인생스러운 오픈런

어. 열렸다.


10시 30분이 되자 핸드폰 시간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유모차 밀던 애기 엄마가 남편 등뒤로 먼저 뛰어가서 줄을 서라 외치자 모르는 사람인 우리도 그 와이프의 말에 함께 하듯 뛰기 시작했다. 아직 새댁 같은 그 남편은 쑥스러운 빠른 걸음이지만, 40대라는 나이를 얻고 창피함을 내줘버린 아줌마는 오로지 줄만 보인다. 미안 난 뛸게.


오랜만에 잠실롯데타워에서 친구 4명과 모임을 하게 되어 브런치를 먹으러 갔는데, 마침 그 앞이 런던베이글이었다. 여기까지 온 길에 이런 것도 먹어보자 의견이 모아져 일명 오픈런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 것이다. 평소에 사람 많고 주차장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맛 집이라도 안 먹어 버리는 내 성격에 오픈런이라니. 그것도 우리 가족 중에 나만 먹는 베이글을 사러 이리 뛰어 줄을 섰다. 그럼 끝난 줄 알았다. 줄이 두 개로 나뉘길래 이 줄은 무슨 줄이고 맞게 선 것인지 불안했지만 앞뒤로 인증샷 찍기 정신없는 젊은이들에게 들이밀며 물어보기에는 나이가 좀 더 필요했다. 타조처럼 목을 쑥 빼고 이리저리 불안한 시선을 보낼 때쯤, 내 줄은 대기 자격을 주는 대기 순번 줄이라는 것을 알았다. 15분을 기다렸을까. 100번에 가까운 순번을 부여받았다. 다시 또 다른 대기 시작이다. 참 인생스럽다.


우리는 운동회 달리기 1등 손등 도장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깔깔거리며 맞은편 카페로 들어갔다. 서로의 뛰는 모습을 놀려대며 얼마나 앞만 보고 달렸는지를 능력 자랑하듯 떠들었다. 그러다 친구 한 명이 그 유명한 철학관에 다녀온 것을 얘기하며 순식간에 주제는 바꿨다. 일타강사 수업 듣는 눈빛으로 진지한 고개 끄덕임은 필수, 말 끊지 말고 질문은 끝나고 하는 아줌마 센스로 서로의 자존감을 높여본다.



친구 아들은 중3. 어느 고등학교를 가야 할지, 전공은 무엇이 좋을지 몇 가지 옵션들 장단점이 49대 51이었다. 고민의 구렁 속에 빠져있는데 신뢰하던 여러 지인들이 가는 것을 보고 용기 내 상담을 갔다. 나는 중3 엄마들이 고3 엄마들보다 철학관에 더 많이 가는 것 같아서 의아했는데, 듣고 보니 고3은 원서 쓸 때 이미 성적이 나와 있어서 성적이 결국 선택의 폭이라 했다. 중3은 중학교 동안의 아이의 실력을 부모도 애도 잘 모르고, 또 일명 이과스타일인지 아닌지 정해져야 그에 유리한 학교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20대 80 정도의 호불호 확실한 일은 고민할 것 도 없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웬만하면 꾸역꾸역 머리를 굴려봐도 49대 51이다.  




이 집 아들은 자존심이 세고 남의 말에는 귀를 막아버리는 캐릭터다. 철학관에서 이 아들은 누가 키워도 벅찼을 것이란 설명에 친구는 엄마인 자기 말이라 안 들었던 것이 아니라니 덜 서운하고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또 다른 걱정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공감 능력이 꽤 떨어지니 사회생활이며 결혼생활이며 싹 다 걱정이라 했다. 차라리 내 말만 안 듣는 게 나은가 싶은 생각이 불쑥 떠오른 스스로에 놀라며 정신 이상한 여자 같아 보였다고 고해성사했다. 내가 쓴 안경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진지한 인생이야기에 좀 가볍게 웃어들 주었다.

 

자기 스스로 기술을 갖고 일을 해야 하는 성향이고 생명 쪽도 잘 맞는다는 말에 이 친구의 머릿속은 아들의 목표가 의대로 굳어졌다. 사실 당연한 논리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직업보다는 혼자만의 기술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 사람과 부딪힐 일이 줄어들어서 성공률이 높다. 또 공감능력 부족한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최대한 피해 진로를 잡으면 직업 만족도도 높아진다. 진로 조언과 힐링과 위로를 받은 그곳의 이야기는 듣는 이들에게 대리만족은 물론 나도 저곳에 늦지 않게 가야겠다는 todo 리스트를 만들어 냈다.


다시 오픈런이다. 이 철학관 시작하는 시간에 연락을 해서 3개월 후 예약이 잡히겠지만 혹시 빈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는 센스로 들이대 본다. 나는 아이가 어려 아직 궁금한 것이 적지만, 친구 둘은 큰 아이들이 있다 보니 마치 런던베이글 10시 30분처럼 핸드폰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울 때 오픈런이 이렇게 중요한 능력인 줄 다들 알고 있었나 보지만, 나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학원 입학이 아니라 입학 테스트 신청도 pc방에 가서 광클릭을 해야 한다고 하고, 학교 방과 후도 클릭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영원히 못 듣고 아이를 졸업시키는 게으른 엄마가 된다. 심지어 롯데월드 매직패스도 오픈런이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오픈런은 일타강사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이 고등학생 뒷바라지에 유용하게 쓰인다.




오픈런에 유리한 사주가 있을까? 있다. 오픈런 잘하는 부러운 사주.

타고난 사주에 나를 뜻하는 글자와 유사한 글자가 많을수록 일반적으로 내 것을 나눠 먹어야 하는 사주이다. 결국 운으로 승부하는 일에서 내 손에 떨어지는 기회가 나눠야 하니 적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내 사주를 도와주고 부모처럼 이끌어 주는 글자가 많다면 같은 오픈런에서도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타고난 것이 없더라도 운의 흐름이 비슷한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럼 내 사주는 어떨까. 나는 어릴 때 이미 깨달았었다. 어떤 줄을 서도 내 줄이 가장 길고, 어떤 식당에 가도 내가 들어가는 순간 손님들이 몰려든다. 내가 지원한 시험은 역대 최대 경쟁률이고 내가 신청한 청약은 온라인에 들썩이는 경쟁률을 자랑한다. 워터파크 구석에 있는 노천탕에 아무도 없길래 슬쩍 들어가는 순간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회사 일을 해도 결국은 남 좋은 일 시키는 경우가 많다. 정말 내가 안 하려 했지만 남편 일정이 안되어 할 수 없이 내가 간 아파트 텃밭 추첨. 지원자 중에 1명 떨어지는데 역시 내가 당첨이다. 이 정도로는 이제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픈런에서 나는 남들의 뒤통수를 보기에 너무 쉬운 사주이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내 것을 챙기지 않으면 뺏긴다는 생각이 컸고, 나눔이 박탈 같았다. 모든 것이 내 것 같은 마음의 사람은 내 것을 안 챙겨도 또 내 것이 생기기에 여유롭게 베풀 수 있다. 이 것이 이들이 또 잘 살아갈 수 있는 사주인 것이다. 이 세상은 베푸는 사람이 잘 살 수 있게 해왔기에 인류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것 같다.


나 같은 오픈런 뒤통수 전문이 살아남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큰 방어는 공격인 것처럼 빼앗기기 전에 먼저 베풀면 된다. 그러면 빼앗기지도 않고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 손에 쥐었던 것을 빼앗길 때 그 기분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지만, 이 전에는 속상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면 이제는 내가 몇 초 늦게 베풀려 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넘기려 한다. 그래야 내 것이 내 것 같다.

오픈런이 성공의 기준이고 괜찮은 사람의 자격이라면, 나는 진작에 탈락했을 것이다. 세상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세상의 속삭임을 순간순간 마주하지만, 오픈런을 못하는 사람이 가끔 한번 되는 경우 10배 100배 기쁘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은 적고 만족은 클 수 있으니 그것에 또 기대를 걸어보는 내 인생이다.


힘들게 산 베이글을 애들이 안 먹는다 하겠지만 또또 기대를 갖고 들이밀어 봤다.


" 베이글 먹어봐. 엄마 이거 사느라고 달리기도 했어."

" 왜요? 우울해서 빵샀어요? " 

아니 그거 기대한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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