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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18. 2024

인류 본사 03/04

이희수 지음,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서 쓰는 주제 서평 >

2024.3.11(월) ~ 3.14(목)            

16,500자, a4 10장 분량이라 4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은 『인류 본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소화할까 생각한다. 학교에서 서구중심 세계사를 배우고 가르쳤기에 첫째, 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 둘째, 알고 있던 내용에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기, 셋째,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을 언급하여 더 깊게 배울 방향 찾기에 중점을 둔다. 끝으로, 『인류 본사』가 가진 의미를 찾는다.


2부 인류 대번영을 이끈 이슬람 문명의 역사     

첫째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는 서구중심 세계사와 비교한다.

이슬람의 황금기 압바스(750~1258)

   압바스 제국은 500년 이상 이슬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중동-서아시아 역사의 주도권이 페르시아인에서 아랍인으로 넘어갔다. 압바스 제국은 아랍인 중심에서 벗어나 피정복지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차별과 배제를 최소화하면서 글로벌 국가로 거듭났다. 이슬람이 세계종교로 확산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의 절정기를 이룬 무대가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면서 500년 압바스 제국의 수명을 다했다. 반세기가 지나서 오스만제국에 의해 재통일되어 아랍인에서 튀르크인으로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바뀐다.      


   이슬람은 예수의 신격을 부정하고,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으로 알라를 믿는 종교다. 이슬람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구약》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를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 신이 보낸 마지막 인간 예언자로 여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재자를 두지 않기에 예수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과 근본정신이 다르다. 현세에서 행한 선악의 경중에 따라 신의 심판을 받고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운명이 나뉜다는 내세관과 모든 것은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예속된다는 정명 사상을 갖고 있다. (p. 325)     

   

   이슬람 공동체가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아부바르크(재위 632~634) 칼리프 이후 30년 만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를 서구에서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란 표현을 사용해 빗대곤 하지만, 당시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했고, 정복 과정에서 이슬람으로의 강제 개종은 실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p. 327)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인 전파를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이슬람은 일단 무력을 사용해 정복한 후에는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하거나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기존 토호 세력을 인정하며 그 지역에서 인두세(무슬림은 내지 않는다)를 거두어들이는 지방분권통치를 채택했고, 정복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개종하면 세금 부담이 줄어드니 시간이 지날수록 개종하는 인구가 늘었다. 5대 칼리프 때에는 세금 감면을 노린 개종을 막기 위해 개종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꾸란》에는 강제 개종을 금하는 구절이 있다. “너희 주님이 원하시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될 터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사람들을 강요해서 믿음을 갖게 하려는가”(《꾸란》10:99)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p.333) 이슬람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퍼진 것은 관용과 포용정책을 편 덕분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적의에 가득 찬 수사는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을 휩쓸던 이슬람 열풍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이슬람 연구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정립해 놓은 극도의 이슬람 혐오 사상의 영향이다. (p. 334) 7세기 이슬람이 태동하면서 취한 타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명백히 관용과 포용이다.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중동의 이슬람 사회는 다양한 민족의 각기 다른 종교와 풍습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공존에 익숙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Dhimmi)’, 혹은 아홀 알딤마(ahl al-dhimma, 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을 일컫는 법률 용어였다.    

  

셀주크튀르크(1040~1157)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셀주크튀르크 왕조에 의해 재통일 되었고, 압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고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수호자를 자처했다. 1071년 셀주크조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황제를 포로로 잡고 비잔티움군을 격퇴하였다. 아나톨리아 지역이 이슬람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1차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되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기사 집단들 간에 통제 불능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1054년 동서 교회 분리 이후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간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교회를 통합하여 로마 가톨릭의 관할 아래 둠으로써 교황권을 확대하는 데 있었다. (p.361) 예루살렘은 638년 무슬림에 의해 장악된 이후 종교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 번도 순례를 방해받지 않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상황을 왜곡, 과장하면서 성지 탈환을 호소하며 유럽인들을 부추겼다. 일상적인 폭력과 성적 타락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기사들에게 이교로들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다. (p.362) 예루살렘을 정복(1099)한 십자군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했고, 제2차 전쟁 때부터는 주변국을 약탈하거나 콘스탄티노플을 초토화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 호라즘샤(1077~1231)

   호라즘샤는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앙아시아(아랄해 남쪽부터 오늘날 이란 영토까지)를 제패한 순니 이슬람 왕조다. 호라즘샤-몽골 전쟁에서 패하여 중앙아시아의 튀르크화와 이슬람 전파가 저지되고 이슬람 문화도시들(사마르칸드, 호라산, 헤라트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유럽인들은 몽골에 호라즘샤가 무너지자 안도했다. 그래서인지 몽골의 문화 말살과 살육보다는 칭기즈칸의 통치정책, 몽골군의 군사 전략, 문화 교류를 통한 이류 문명에 대한 기여 등을 연구하여 칭기즈칸을 우상화하고 영웅담을 확대재생산 해왔다. (p.384)     

인류 최대의 대제국 오스만(1299~1923)

   오스만제국은 20세기까지 존속한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이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이라고 한다. (p.523) 13년 만에 분할된 알렉산더 제국, 반세기 만에 와해한 몽골 제국에 견줄 때 인구, 지배영역, 문화 수준, 세계관 등에서 명실상부한 대제국이다. 소수집단에 자치권 부여, 밀레트 제도(인재 등용 정책), 예니체리 등을 통해 남동부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을 석권했다. 흑해, 에게해, 지중해, 페르시아만 바다를 독점했으며, 카스피해와 대서양은 물론 인도양까지 영향을 미쳤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공격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군대에 함락되기 직전 교황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제의가 왔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던 비잔티움 시민들은 콘스탄티누스 11세와는 달리 이교도의 터번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면 유럽의 파병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패망의 길을 택했다. (p.365) 인류 본사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진출로 인해 오리엔트 지역을 통한 종래의 동서 교역로가 차단되면서 유럽인들이 동방으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P. 541) 신항로 탐험은 오스만이 유럽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시작한 일이다. 게다가 튀르크인들이 유럽에 진출한 후 동서 교역로는 오히려 활성화되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신항로 탐험에 나선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홍해-인도양 루트’를 이용하는 유럽과 동방 간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베리아반도의 상인들이 지중해와 홍해를 거치지 않고 대서양으로 나가는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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