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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16. 2024

인류 본사 02/04

이희수 지음,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서 쓰는 주제 서평 >

2024.3.11(월) ~ 3.14(목)            

16,500자, a4 10장 분량이라 4회로 나누어 공유한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은 『인류 본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소화할까 생각한다. 학교에서 서구중심 세계사를 배우고 가르쳤기에 첫째, 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 둘째, 알고 있던 내용에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기, 셋째,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을 언급하여 더 깊게 배울 방향 찾기에 중점을 둔다. 끝으로, 『인류 본사』가 가진 의미를 찾는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B.C. 550~B.C. 330)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가 외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모반해 세웠다. 나라 이름을 메디나에서 페르시아로 바꿨으나 언어, 지배계층, 문화는 연장되었다. 키루스가 제국을 통치한 대원칙은 다문화 정책과 관용정책이다. 중앙정부에 정치적으로 복속하고 조세를 내고 군사적 통제를 받는 조건으로 개별 국가나 군소 공동체에 일정한 자치와 자율권을 부여했다. 이런 전통은 초기 이슬람 시대를 거쳐 오스만제국 시대까지 이어졌다. 키루스는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서 고향으로 귀환을 허락하며 수만 명 유대인의 노임을 계산해 챙겨주고 신전을 지을 비용까지 대주었다. (에스라서 1:1~4) ‘키루스 원통’이라는 도기에 새긴 쐐기문자는 인권선언문이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의 효시로 여겨진다. 키루스 무덤 주변은 관개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페르시아어로 ‘갇힌 정원’이란 의미의 ‘파라다이아’로 불렸고, 여기서 오늘날 ' 파라다이스(Paradise)’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p. 167)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팔레비 이란 국왕, 이스라엘 건국자 벤구리온, 아테네 출신 역사가 크세노폰(《그리스 역사》를 지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 전기 역사이고,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는 그리스 후기 역사다)은 키루스를 예찬했다. 

   페르시아의 ‘왕의 길’을 벤치마킹한 로마는 역전제와 아피아 가도를 고안했다. 페르시아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이고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조로아스터교의 고대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이원론적 세계로 우주와 인간 세상이 대결구도 속에 진행된다. 인간은 내면에 선과 악 이란 상반된 속성을 품고 있으며, 미리 정해진 운명이란 없고 타고난 이성과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선순환하는 생활철학이 교리의 중심이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를 라틴어로 ‘마구스(Magus)’라고 하는데, 페르시아어에서 라틴어,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 magic과 magician가 됐다. 유향과 몰약을 들고 마구간에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다(p. 196) 초상화나 인물이 포함된 상상화, 상징물을 제작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배격했다. 

   영화 ‘300’에서 묘사된 그리스-페르시아 간 전쟁은 지나친 왜곡이다. 2세기 로마 제정 시대 문학가 루키아노스는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혹평한다. 그리스 작가들이 묘사한 페르시아 전쟁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반세기 동안 11차례 공략했으나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고, 마라톤 전투에서는 패했다. 이란에서 마라톤은 인기가 없단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유래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단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B.C. 330년 알렉산더에게 패하며 220년 역사를 끝냈다. 

연꽃은 B.C. 3,000년 경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간다라와 중국을 거쳐 6세기에 한반도 불교문화로 전해졌다.      

파르티아(안식국) (B.C. 247~224)

   우리 교과서에서 나라 이름 정도만 언급되었으나 파르티아는 500년간 로마에 맞선 대제국이었다.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오늘날 동쪽의 튀르키예 일부, 이라크, 이란을 포함하는 오리엔트 핵심지역을 장악하고 로마와 경쟁 또는 협력하며 471년간 존속했다. 로마와 중국, 동아시아 간 중계무역으로 경제를 다졌다. 파르티아는 로마와 300여 년간 전쟁을 치렀다. 아르메니아 지역이 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충지로 로마와 파르티아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한 지역이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는 파르티아를 공격하지 않는다(서로 지친 탓에)는 불문율이 있었기에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하였다. (역사지도를 펼치면 이해가 쉽다) 파르티아가 중국이나 로마에 군사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중앙아시아의 말을 이용해 끊임없이 기병을 양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레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명한 결전이었던 로마와 파르티아 간 전투로 마지막 결전에서 로마의 크라수스가 전사한다. (P. 247) 로마와의 긴 전쟁은 파르티아의 중앙 권력을 약화하기에 충분했다. 파르티아의 주류 신앙은 이란 동부에 뿌리내린 ‘미트라교’였다.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로 보기도 했으나, 최근 연구자들은 조로아스터교 이전부터이란, 인도 지방에 존재한 독립된 신앙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미트라교가 로마로 건너가 미트라가 로마의 군신이 되고,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로마 상층부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인 스스로 미트라교를 ‘페르시아 밀교’라 칭했으니 페르시아 신앙과 관련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로마와 500년 가까이 전쟁과 교역을 통해 접촉과 교류를 했던 파르티아를 떼어 놓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독교 교리와 불교의 내세관이 가미된 종교로 4세기 초 로마,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위구르, 티베트 불교에 영향을 끼침)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마니교의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정립한다. 천국과 지옥, 이생과 전생, 천사와 사탄, 최고신에 대항하는 악신 등 조로아스터교 신앙의 이원론적 변증법이 기독교 교리 완성에 작동했다고 본다. (P.274)

   저자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이었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후예로 선조들이 이룩한 제국의 거버넌스를 계승한 파르티아는 로마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와 문화적 실체를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사산조 페르시아(224~651)

   사산조 페르시아는 B.C. 6세기부터 1,200년간 서아시아에 페르시아 문명을 꽃피운 거대한 제국 중 하나로 마지막을 장식한 나라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조 페르시아)  3개 도시에 아카데미가 있었고, 5세기 설립된 ‘군데샤푸르’의 아카데미는 6~7세기 당대 최고의 학문의 전당이었다.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폐쇄하자 아테네에서 쫓겨난 그리스 철학자와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정통에서 이단으로 봄) 학자들이 아카데미 교수진을 형성했다. 인도의 천문학과 점성술, 수학과 의학, 중국의 전통의학이 소개되고 각 지역의 의학 지식이 집대성되어 치유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번역하고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조너선 라이언스가 지은 『지혜의 집』은 더욱 상세하게 기술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와 예술은 입수쌍조(가운데 나무가 있고 양옆으로 새가 쌍을 이루고 서 있는 양식) 디자인, 아라베스크 무늬, 건축양식 이완(책으로는 알 수 없어 더 공부해야 할 듯) 등은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한반도, 아나톨리아, 발칸반도, 이집트, 이베리아반도까지 퍼졌다. 타지마할과 알함브라 궁전 양식에 드러난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에 멸망하면서 몇몇 왕족과 귀족이 아랍군을 피해 동방으로 도망하다가 당나라에 정착하기도 했다. 《구당서》에 기록이 있고, 사산조 왕족의 후예가 후일 신라로 망명하여 살았다는 내용의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가 발견되었다. (p.309)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으로 오리엔트 세계는 이란 민족에서 아랍 민족으로 주인공이 바뀌게 된다. 1,200년간 축적된 페르시아 문화는 문화적 토대가 축적되지 않은 아라비아반도 중심의 아랍 정치 세력을 문명화한 세상으로 이끈 촉매제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 문명이 안내한 길을 따라간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고, 티무르 제국왕실의 후예는 인도에서 무굴제국을 세웠다.   

   

셋째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은 더 깊게 배울 방향을 찾는 소재로 삼는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세 문명은 독립적이지 않고 이미 5천 년 전부터 광범위한 접촉과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현대 고고학이 밝혀냈다. 저자는 에게해에 있는 ‘산토리니섬이 대폭발’한 사건은 지중해를 둘러싼 미케네, 크레타, 트로이, 프리기아, 히타이트, 페니키아, 이집트의 고대 역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토대로 가설을 제시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진전을 기대한다.     

로마와 500여 년간 경쟁과 협력했던 파르티아는 다언어, 다문화 사회였음에도 뚜렷하게 문자로 기록된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파르티아 왕실은 음유시인들의 창작을 장려해 수많은 서사시의 전통을 남겨 후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 서사시의 놀라운 발전을 가능케 했다. 파르티아의 주류 신앙인 미트라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가 불교와 습합(習合, 절충한다는 의미)하여 미륵불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P. 273) 저자는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정한 것도 미트라 전통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P. 298)


3회로 이어집니다.


P.S. 이완(iwan (페르시아어 : ایوان eyvān, 아랍어 : إيوان Iwan, 철자가있는 ivan, 터키어 : eyvan)은 일반적으로 한 쪽 끝이 완전히 열리는 3면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홀 또는 공간입니다.)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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