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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Apr 02. 2024

내훈(內訓)


   공교육에서 부지불식간에 배운 것에 오류가 있고, 선입견이 생겨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남자나 남편이 여자나 아내보다 주장을 강하게 하거나 의견을 관철할 때, 여성들은 남자에게 ‘조선 시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라고 말한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다’라는 걸 믿고 사는 남자가 있겠냐 마는 왜 그런 사고체계를 가졌었는가? 조선 시대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조차 귀하다. 삼종지도나, 칠거지악을 운운하면 누구에게나 뒤떨어진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의 시각에서 쫓을 일은 아님에 공감한다. 그런데도 『내훈』을 읽는다.     


   『내훈』은 조선 9대 성종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맏며느리고 폐주 연산군의 할머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편찬자다. 소혜왕후는 21살에 청상이 됐으니, 개인적인 삶을 보면 애처롭다. 신료들로부터 “문자를 알고 사리에 밝다”라는 평가를 받아 세조의 불경 간행 사업에 ‘문장을 소리 내 읽으면서 교정하는 역할’로 동참하였다. 『내훈』은 창작이 아니라 46권의 고전 문헌에서 발췌 인용하여 구성한 텍스트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그녀가 읽었던 소학, 열녀, 여교, 명감, 근사록, 삼국지, 맹자 등 고전에서 좋은 글을 골라 체제를 갖추어 편찬한 거다. 한문 원문과 언해문이 짝을 이루는 구성과 언해문에 세주(細註)를 달아두어 교양 수준이 낮은 여성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소학』의 보수적인 정절관념을 취하지 않았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윤리규범이라기보다 남녀 모두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행실에 관한 내용이 절반이상이다. 물론, 성별 차이에 대한 지식과 함께 상층 신분에게 유의미한 지식으로 구성된 텍스트라서 신분 차이가 없는 현대 시각에서 흡족하지 않을 수 있다. 소혜왕후의 적극적인 독서와 배움의 결과인 『내훈』을 읽는 것은 유교 문명의 고전에 한발 다가설 기회다.     


‘서문’을 여러 번 읽은 까닭은 서문의 격에 맞게 잘 쓴 글이기 때문이라 옮겨본다.   

  

“무릇 사람은 태어날 때 하늘과 땅의 영험한 기운을 받고 오상의 덕을 품어 이치로는 옥과 돌이 다름이 없되 난초와 쑥이 차이가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자신의 몸을 닦는 도리에 있어서 다하고 다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 주나라 문왕의 교화가 태사의 밝은 덕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었고, 초나라 장왕이 패주가 될 때 번희의 힘이 컸으니, 임금을 섬기고 지아비를 섬김에 있어서 누가 이들보다 나을 수 있으리오. 
나는 책을 읽다가 달기의 웃음과 포사의 총애와 여희의 울음과 비연의 참소에 이르러 일찍이 책을 덮고 마음에 서늘함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보건대, 나라와 집안의 치란흥망(治亂興亡)이 비록 남편과 군주의 총명함과 우매함에 달려 있으나 부녀자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에도 관계된다. 따라서 부녀자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남자는 마음이 호연한 가운데 노닐고 뜻을 미묘한 데 두어서 옳고 그름을 스스로 분별하여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있으니, 어찌 나의 가르침을 기다린 후에 행하리오. 여자는 그렇지 않아서 길쌈의 굵고 가는 것에 만족하고 덕행의 높음을 알지 못하니, 이는 내가 날마다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또한, 바탕이 맑고 통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인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귀하게 되면, 이는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격이며 담장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 진실로 세상에 몸을 세우고 남과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은 천금으로도 다 갚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에는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이 있으니, 맹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는 일을 두고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이는 진실로 할 수 없지만, 윗사람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일을 두고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이는 하지 않는 것일지언정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윗사람을 위하여 나뭇가지를 꺾는 일은 쉽고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는 일은 어렵다. 이로써 보건대 몸을 닦는 도리는 너희들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요와 순은 천하의 큰 성인이시나 단주와 상균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엄한 아버지가 부지런히 가르쳐도 도리어 어질지 못한 자식이 있거늘 더구나 나는 홀어미로 옥 같은 마음을 지닌 며느리를 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소학・열녀・여교・명감’ 등이 매우 적절하고 명백하되 권수가 자못 많아 쉽게 알지 못하므로, 이에 네 권의 책 가운데 중요한 말씀을 취하여 일곱 장으로 엮어 너희에게 주노라.
아아! 한 몸의 가르침이 여기 다 갖추어져 있으니, 그 길을 한번 잃으면 비록 후회한들 좇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날마다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라. 밝은 거울이 맑고 맑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성화 을미년(1475) 초겨울 어느 날”     


   7개의 장은 언행장, 효친장, 혼례장, 부부장, 모의장, 돈목장, 염검장이다.

   언행장의 첫 글은 ‘입을 조심하라’라는 것이다. 식사예절, 섹슈얼리티를 관리하려는 방편으로서의 남녀유별, 남의 집을 출입할 때, 시선 처리, 몸을 삼가고 또 삼가라, 말이 많음은 재앙의 시작이다, 언행일치, 창졸간에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기, 말은 믿을 수 있게, 행동은 돈독하게,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사람다움은 예와 의에 있나니, 자신의 허물 듣기를 기뻐하라, 적선지가는 필유여경,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길러라, 재물에 따른 마음가짐, 아무리 사소해도 악은 행하지 말라, 타인을 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책하라, 의는 무조건 행하고 이익은 겁쟁이처럼 피하라는 글이다. 모두 현대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글이다. 현대에 맞지 않는 글은 임금을 대할 때의 말과 행동, 남녀유별뿐이다.     


   효친장은 문왕, 무왕, 증자의 효행, 부모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라,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함은 패덕, 부모가 아끼던 사람은 부모 사후에도 공경하라는 글은 현재도 유의미하다.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의 태도는 여자들이 어찌 볼까 궁금하다.      


   혼례장의 글 중에는 조혼하지 마라, 혼인할 때 재물을 논하지 마라, 부귀를 기준으로 며느리를 구하지 말라, 딸은 친정보다 나은 집으로 시집보내라 등은 오늘날에도 합당한 글이다.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은 예외로 둔다. 부모상을 함께 치렀거나, 친정에 살붙이가 없거나, 부를 함께 이루었을 때는 아내를 물리칠 수 없었음을 본다.     

   부부장에서는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니 여자도 가르쳐라를 제외하면 여자에게 복종을 강조하는 글이다.      


   모의장(母儀章)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는 글이다. 딸에게 가르쳐야 할 것과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맹모삼천과 맹모단기 외에도 의를 강조한 어머니들의 사례를 여러 건 소개한다.     


   돈목장(敦睦章)은 동서지간, 형제간의 우의를 강조하는 글이다.


   염검장(廉儉章)은 안빈낙도, 검소함을 예찬한다.          


   서문과 본문을 읽으며 여러 곳에 밑줄을 긋는다.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기르면서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며…….   

  

『내훈』은 한길사에서 2011년 5월 초판 1쇄, 본문 427쪽 분량으로 내놓았으나, 313쪽부터는 내훈 언해 문이라 중복되지 읽지 않아도 된다.


P.S. 2018.3.28.(수)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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