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옥 지음
육사에서 정년퇴직한 철학 교수로 조승옥님이 이미 육사 30년사, 50년사 60년사가 있지만, 육사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히기에 미흡하여 수년간의 연구 성과를 담아 『육군사관학교』를 내놓았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재학생 출신 10명이 국군 장교가 되었고, 창군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음으로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창군과 무관하다는 육사 30년사와 50년사의 기술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일제 강점기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 무관학교 등을 통해 그 명맥이 이어졌으며,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그 정신과 인맥이 계승되었고, 독립군과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명맥이 단절되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라고 판단한다. (P. 470)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연무 공원을 시원으로 하여 대한제국 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 무관학교, 독립군, 광복군을 계승한 민족사관학교이다.”
육사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연무 공원(1888~1894), 대한제국 무관학교(1898~1909), 신흥무관학교(1911~1920), 육군무관학교(1920)와 한국광복군(1940~1946), 육군사관학교(1946~)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다. 신흥무관학교와 광복군은 학교 역사에서 언급되기에 이름 정도만 알던 얕은 역사 지식인지라 연무 공원과 육군무관학교는 생소했으나 상세한 조사결과를 보니 맥이 닿아 있음을 알겠다. 세계적으로 사관학교의 설립이 귀족 사관학교에서 전문 직업 장교가 등장하는 배경과 한국, 중국, 일본의 사관학교 도입 과정은 흥미 있는 교양이 될 듯하다.
광무 개혁의 의의는 이미 이태진의 『고종 시대의 재조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설립과 광무 국방개혁의 상세한 내용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군대해산과 항일무장 투쟁을 상술하고 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내용이 상세하다. 황태연의 『갑진 왜란과 국민 전쟁』에서 다룬 내용과 다르지 않다. 특히 사료에 근거하여 당시 독립군, 광복군 등의 수를 파악해 제시하였기 때문에 막연한 독립운동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영국과 합작하여 미얀마 전선에서 성과를 내고, 미군과도 협력하였음을 어떤 책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관한 내용은 비중이 작다. 이는 차남의 조언에 따라 육군사관학교 역사를 후속편으로 집필하려는 뜻이 있다고 밝혀 아쉬움을 달랜다.
본문을 통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귀족이 아닌 사람도 장교가 되거나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p.24) 1806년 나폴레옹과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은 장교 임용령에서 출신 성분이 아니라 우수한 자질은 장교 임용조건으로 삼았다. (p.26) 전문 직업 장교 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프로이센 육군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승리함으로써 효력을 발휘했다. 중국은 양무운동 과정에서 사관학교 제도를 도입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인 퇴역 장교를 교관으로 초청한 연무 공원(1888년)이 우리나라 사관학교의 효시가 된다. (p.49) 연무 공원이라 한 것은 무술을 연마하는 관립학교라는 의미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사관학교다.
‘춘생문 사건’이란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친일세력에 포위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 임금을 궐 밖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이학균을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교장으로 재직하며 미군의 전술교재, 훈련규칙을 번역하고 교재개발, 교과과정, 교육방법 등을 제정해 교육체계를 확립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를 배출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아리토모 일본 외무대신이 조선을 북위 39 도선에서 나누어 러시아와 일본이 점령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러시아 외무상 로바노프가 대안으로 러, 일 양국 군대의 충돌을 예방하기 위하여 중립지대를 설정하자고 제안하여 이를 비밀 조항으로 채택하였다.”(p. 86)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불리한 처지인지를 확인한다. 강대국의 힘은 한반도를 38선, 휴전선으로 남아있고 남한은 섬과 같은 처지다.
서울이 근대 도시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96년부터 1899년까지 한성판윤으로 재직한 이채연에서 비롯된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되어 운행을 시작하였다. 동양에서는 도쿄, 홍콩, 상하이, 베이징보다 먼저 서울에서 전차가 운행되었다.
광무 개혁으로 1900년대 초 중앙에 4개 연대 9,000명과 지방에 6개 연대 1만 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자주독립을 지향하던 시대적 여망에 부응했다고 본다.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1903년까지 대한제국 군대가 보유한 소총은 최소 3만 정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p.119)
군대해산 과정에서 서울 시위대의 항전은 단 하루 만에 끝났으나, 이 항전은 이후 계속될 지방 진위대 해산계획에 차질을 빚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의 항일 투쟁은 이후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p.144) 영국의 맥켄지 기자는 해산군인들이 조직하고 훈련한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 있다고 듣고, 이를 양평에서 의병부대를 직접 만나 확인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의병 사진은 이때 맥켄지가 촬영한 것이다. (p.146) 이 같은 의병 투쟁을 황태연은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서 국민전쟁으로 명명한다. 외국에서도 이를 의병투쟁이 아닌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일제의 강압으로 문을 닫았지만, 무관학교의 자주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일제 강점기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신민부 성동사관학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등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갔다. 그리고 해방 후 태릉 육군사관학교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과 무기 구매 협상을 통해 북로군정서 독립군에게 충분한 무기를 공급해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청산리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대첩을 거둔 전투였다. 무기와 훈련이 부족한 900명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 5,000명을 상대로 싸웠다. 일제에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설욕전이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광복군보다 2년이나 앞선다. 이후 김원봉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5.16 군사 정부에서 수여한 것이다. (p.277)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서울로 봉환되었고, 최고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런 정황에서도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없애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홍범도 연구가들은 홍범도를 영웅적 항일투사로 평가한다. (p.279)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p. 281)
임시정부 무관학교는 수명은 짧았지만,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여,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운 무관학교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p.332) 중국 시안은 화베이 지역에 이주해 있던 20여만 명의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모병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요충지었다. (p.346)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조소앙 외무부장이 낭독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릍 통해 “한국광복군은 일찍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에 이어 성립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며, 왜적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 때인 것이다.”라고 하여 광복군이 대한제국 국군의 항이 투쟁 정신을 이어받은 의병-독립군-으로 이어진 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p. 350)
일제 강점기 징집령에 따라 일본군에 강제 입대한 한국인은 육군 18만7,000명, 해군 2만 2,000여 명 등 20만여 명이며, 일본군 군속으로 복무한 15만 5천여 명, 지원병 2만 1,000여 명을 합치면 39만여 명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p 393)
1952년 전쟁 중 진해에서 재개교한 육군사관학교는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모델로 4년 정규과정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웨스트포인트 방식을 따랐다.
퇴직 이후에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육군사관학교』 써낸 저자나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이다. 사관학교란 이름이 일본식이라 무관학교로 바뀌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응원을 보낸다.
P.S. 출판사 글씨앗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