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브런치스토리에 오직 독서뿐을 읽고 쓴 글들이 적지 않다.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옮긴 <오직 독서뿐>은 조선 후기 학자 아홉이 어떻게 책을 읽고, 어떤 목적으로 공부했는가를 선인들의 저술에서 뽑고 저자의 생각을 보태 놓은 책이다. 허균, 이익,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는 학창 시절 역사책에 이름을 올린 분들이고, 홍석주와 홍길주는 형제며, 양응수는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이 중에 성호사설로 조금 알게 된 이익보다 간서치라는 별명이 붙은 이덕무에게 마음이 간다. 가난한 서자인 이덕무의 삶을 알기에 그런 거다.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때는 ‘집중해야 한다.’, ‘난잡한 독서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읽기보다 쓰기가 좋다.’, ‘옛글(고전)을 읽어라.’ 등 몇 가지 돌아다니는 조언이 있다. 선인들은 책을 읽을 때 어떠했을까 궁금증을 풀도록 선인의 글을 한글로 옮기고, 한문 원전과 옮긴이의 생각을 세트로 구성해 편집됐다. 천 권까지는 넓게 읽겠노라 다짐을 하고 있다. 평생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읽거나, 워렌 버핏이 하는 몇 개월씩 한 주제에 집중하고 주제 바꾸기, 이 책의 선인들이 서산(書算)을 사용해 수백, 수천 번 읽기는 아직 내겐 미뤄 둘 일이다.
원전의 번역과 저자의 생각을 섞어 몇 가지를 옮겨본다.
책을 읽는 까닭(허균)
밤은 낮의 나머지요, 비 오는 날은 갠 날의 나머지고,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이다. 밤, 비 오는 날, 겨울이 독서하기 좋은 때다.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과 무작정 읽은 사람은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금세 구분된다. 문제 앞에서 허둥대며 수선만 떤다면 여태까지 그의 독서는 죽은 독서다. 상황 속에서 비로소 위력을 발휘해야 제대로 한 독서다. 몰입하는 독서라야 제대로 된 독서다. 한 줄 읽고 딴생각하고, 한 장 읽고 딴짓하는 독서는 독서랄 것도 없다. 많은 책을 섭렵하여 안목을 넓히고 기초를 다져야 한다. 하지만 삶의 버팀목이 되어 줄 몇 권만큼은 평생의 반려로 삼아 읽고 또 읽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천하의 일은 이로움과 해로움이 반반인데, 온통 이롭고 작은 해로움도 없는 것은 다만 책뿐이다.”
의문과 메모의 독서법(성호 이익)
큰일을 앞에 두고 시비를 따져야 한다면 작록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독서는 그 힘을 기르기 위함이다. 밥 먹은 효과는 피부의 윤택으로 드러나고, 책 읽는 보람은 사람의 교양으로 나타난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남 하는 대로만 하면 끝내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내 보자고 공부를 한다. 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학문은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 의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얻어도 야물지 않다. 이렇게 해야 옳은 줄 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울러 살펴야 한다. 역사책을 읽을 때 시시비비는 언뜻 분명해 보여도 두부모 가르듯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 옳은 것도 없고 전부 그른 것도 없다. 시비와 선악은 서로 물려있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은 쉬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란 것은 성패가 이미 정해진 뒤에 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꾸미게 마련이니, 이를 보면 마치 진실로 마땅한 것만 같다. “천하의 일은 놓인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이 좋고 나쁨은 그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가 된다.” 세상은 착한 사람이 복 만고, 악한 사람이 벌 받는 그런 공정한 곳이 아니다.
옛 성현의 독서 아포리즘(양응수)
책을 읽을 때 마땅히 문장의 기세와 아래위의 뜻을 살펴야 한다. 책을 보는 까닭은 자기의 의심을 풀고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밝히는 데 있다. 책을 볼 때는 다만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이치가 담긴 곳을 찬찬히 살려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보아 얻으려 하면 할수록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니, 한걸음 물러서서 살펴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병통은 집착하여 내려놓지 않아 생긴다. 읽던 대로 읽으면 백날 읽어도 발전이 없다. 스스로 판단하라. 점검 없이는 아무리 읽어도 소용이 없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 낸다는 말은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 억지로 읽지 말고 잠깐 내려놓는 것이 옳다. 생각을 비워 내고 다음에 차분히 읽으면 전에 깜깜하게 모르던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공부의 요령은 구방심(求放心)에 있다. 멋대로 돌아다니는 마음부터 붙들어 앉혀야 한다. 그저 활자 적힌 종이를 눈으로 한차례 지나갔다 해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게 울림이 없다면 성인의 말씀이 무슨 소용인가? 독서는 의심이 없는 것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이 있는 것에서 의심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깨달아야 할 이치란 여러 겹으로 포장한 물건과 같다. 금방 어찌해 보려 들면 영영 못한다. 진득해야 공부다. 보고 못 보면 안 보느니만 못하다. 차분히 책 속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년 이후의 독서는 집중처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화두를 들고 찬찬히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있어야 한다. 여기저기 기웃대기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깊이 보는 것이 맞다. 쉬지 않고 꾸준히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툭 터진다.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만남을 절제해야 공부를 할 수 있다.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가 답이다. <논어>는 구절과 뜻마다 각기 한 가지 의리를 담고 있어 자세하고 고요히 살펴야만 한다. <맹자>는 큰 단락으로 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해서 숙독해야 글의 뜻이 드러난다. 독서는 숙독해야 한다. 그 말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해야 한다. 그래야만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바탕을 다지는 자득의 독서(안정복)
아무리 어려운 책도 읽고 또 읽으면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이 온다. ‘책은 반드시 1만 번을 읽은 뒤라야 그 정신과 통할 수 있다.’ 책은 잘 읽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읽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 ‘반드시 집안 살림은 관심 두지 않고 괴롭게 공부해서 오래 습관이 쌓인다면 절로 시원스러운 지점이 있게 된다.’(요즘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나를 크게 세우려면 나를 눌러라. 내 말을 하려거든 말을 아껴라. 공부는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것이지, 사람을 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지 않고 엉덩이로 한다.
독서의 바른 태도와 방법(홍대용)
공부의 가장 큰 적은 뜬 생각(浮念)이다. 답은 바른 자세에서 출발한다. 등허리를 곧추세워라. 척추는 정신이 지나가는 통로다. 떠들며 돌아다니지 말고, 한자리에 묵직하게 앉아 입을 다문다. 두 눈도 감아라. 더는 입력하지 말고, 이미 입력된 것도 걷어 내야 한다. 작자의 본뜻을 못 만난다면 철옹성 앞에 선 오합지졸 격이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이 곧 공부요 독서다. 편히 앉아서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은 인생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독서는 없는 시간을 어렵게 쪼개서 하는 것이지, 시간이 남아돌아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낯빛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집중하되 기운은 편안하게 갖는다. 고전 읽기에도 바쁜데 음란하고 잡스런 책에 정신을 파는 것은 공부를 망치고 뜻을 잃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독서는 깨닭음이다(연암 박지원)
닭이 울면 일어나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간밤에 읽었던 것을 복습해서 가만히 다시금 헤아려 본다. 뜻이 잘 통하지 않은 곳은 없는지, 의미가 분명치 않은 곳은 없는지, 글자를 잘 읽지는 않았는지를 마음에 점검해 보고 몸에 체득해 보아, 스스로 얻은 점이 있거든 기뻐하며 잊지 말아야 한다. 선비의 지위는 농부와 다를 게 없으나 그는 임금조차 벗으로 사귈 수가 있다. 입으로만 외우는 앵무새 공부와 읽는 시늉만 하는 원숭이 독서로는 삶을 바꿀 수 없다. 책의 내용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잘하는 것은 독서의 진정한 보람과 거리가 멀다. 이런 것을 책 읽는 보람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 읽어서 마음이 기쁘고, 생각이 변하며, 삶이 바뀐다. 이보다 더한 보람이 어디 있는가? 군자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독서뿐이다.
생활의 습관, 독서의 발견(아정 이덕무)
힘이 되는 고전을 분을 내서 읽어야 한다. 써먹으려고만 읽는 것은 나쁘지만, 읽기만 하고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죽은 독서다. “첫째,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두 배는 낭랑해져서,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흐르고 돌아 몸속이 편안해지니 추위를 잊어버리기 충분하다. 셋째, 이런저런 근심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이 글자에만 쏠려 마음이 이치와 하나가 된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넷째, 병으로 기침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시원스레 통해 아무 걸림이 없어져서 기침 소리도 문득 멎는다.” 가난한 서생이 꼽은 독서의 네 가지 유익한 점이 서글프다. 젠체하고 잘난 체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차라리 몰라서 무식한 속인만도 못하다. 속인은 해로움이 자신에게 미치지만, 이런 인간은 해로움이 꼭 남에게까지 가닿으니 문제다. 말과 행동이 몸과 마음 위를 향해서 기대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늙도록 그저 허공을 낚아채는 격이다. 의심스러운 일이나 의심 나는 글자가 있거든 그 즉시 類書(백과사전류)나 字書(사전)를 살펴 점검해 보아라.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모르면서 알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끄럽다. 공부는 책만 붙들고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군자는 책 읽는 틈틈이 울타리를 엮거나 담장을 쌓고, 뜨락을 쓸거나 거름을 쳐야 한다.
안목과 통찰(홍석주)
배우는 자가 도를 구하는 세 가지는 엄한 스승과 좋은 벗을 따라 날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옛사람의 책을 읽고, 길을 떠나 유람하면서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讀萬卷書, 行萬里路’. 인생의 스승이 될 고전 한 권을 가까이에 두고 손 때 묻혀 가면서 인생길을 함께 건너가는 것도 독서의 큰 기쁨이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어 뜻을 풀이하는 것은 그 시대를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다.’(讀書解義者 不可不先考其時也). 존심(存心), 즉 생각의 공격으로부터 마음을 보존해 지켜 내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온전히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사색과 깨닭음의 독서(홍길주)
맹자는 학문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라 한다. 글 한 줄을 읽고는 나는 어떤가 돌이켜 본다. 남의 행실을 보면 나는 어떤가 되돌아본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나는 어찌할까 생각해 본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는 것은 공부가 부족하다는 증거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얽매여서 늘 핵심을 놓친다. 그리고는 공연히 책을 탓하고 저자를 타박한다. 공부의 힘은 전체를 장악하는 데서 나온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다.
<오직 독서뿐>은 김영사에서 2103년 6월 초판을 냈다. 나는 2014년 1판 20쇄, 본문 405쪽 분량을 읽은 거다. 10년 전 일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인문/독세에세이로 분류된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 서평을 쓰실 브런치 작가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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