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슈 지음
철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많이 알거나 내공이 쌓여 달라진 것이 아니다. 서가에 꽂아 둔 책 중에 문학만큼 종류가 많지만, 사회학(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와 ‘소유냐 존재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등) 책에서 만나는 철학이 많더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부터 중세, 근대, 현대의 서양 철학과 제자백가의 글들을 읽지만, 독자는 아직 초심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년 내에 읽은 사이토 다카시의 <철학 읽는 힘>은 서양 철학사를 쉽게 풀어주어 맥락을 잡는 데 도움을 받았다. 알랭 드 보통의 <위대한 사상가>에서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를 만날 수 있었다. 야마구치 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며, 철학의 실용성을 배운다. 여기서 속상한 것은 한국이 철학 교수들은 사이토 다카시나 야마구치 슈와 같이 철학에 접근하고 쉬운 책으로 내놓지 않는 가다. 못하는 것인가? 나는 질투한다.
“교양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라며 우리는 왜 철학을 배워야만 하는가? 묻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비판적 사고의 핵심을 배우고, 어젠다를 정하며,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고. 프롤로그를 통해 아베는 철학이 없으니 1930년대의 영광을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하여 더 위험한 존재다. 일본에게.
목차가 시간 축을 따르지 않고 유용성에 기준을 두고 철학 이외의 영역도 함께 다루기에 기존 철학 입문서와 다르다. 독자들이 왜 철학 앞에서 좌절하는가를 “물음의 종류 What과 How", "배움의 종류 ‘프로세스’와 ‘아웃풋’으로 정리한다. 하우와 프로세스에 주목한 저자에 공감한다.
사람과 조직에 관한 글은 졸저에서 다루었기에 ‘사회’에 관한 핵심 개념만 나열해 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전개되는 노동과 자본의 분리, 분업에 의한 노동의 시스템화가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본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 규칙을 깼을 때 벌칙이 가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박탈할 수 있는 거대한 권위체를 두고 그 권력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거대한 권력에 지배된 질서 있는 사회’와 ‘자유롭지만 무질서한 사회’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 묻고 답한다. (청교도 혁명 당시의 상황에서 도출)
“집합적인 의사 결정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 그 집단 속에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의 판단보다 질 높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음”을 장 자크 루소는 일반의지라 정의한다. 찰스 다윈의 자연도태 :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돌연변이/유전/자연선택의 개념은 찰스 다윈에 이르러 개념화되었다. 자연도태란 개념은 세계나 사회의 성립과 변화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긍정과 부정이란 판단을 하지 않고.
에밀 뒤르켐은 ‘사회의 규제와 규칙이 느슨해져도 개인이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불안정한 상태’를 아노미로 규정하는데,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유사한 맥락으로 본다. 스스로 아노미 상태를 이겨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가족 회복, 횡적 커뮤니티는 이해가 가지만, 소셜미디어는 접수에 대해선 알 수 없다. 증여를 의무(증여할 의무/받을 의무/답례 의무)로 보는 마르셀 모스의 견해는 등가 교환을 원칙으로 하는 경제학 개념으로 풀 수 없다. 모스가 증여에 주목한 것은 유럽 사회가 증여라는 관습을 잃어버렸기에 경제 시스템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유명한 말이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 성 편견에 대한 무자각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최대의 장벽이다. 세르주 모스코비치는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고 본다. 격차나 차별로 인한 질투의 감정은 사회 조직의 동질성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구성원에게 상처를 준다. 알렉시스 토크빌도 같은 생각(모든 것이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에서 배울 것은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에서는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장 보드리아르의 차이적 소비는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돈을 쓴다고 판단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파리의 패션이 세계 패션을 이끌어 가는가? 멜린 러너의 공정한 세상 가설은 맹목적인 목표와 노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보이지 않는 노력도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거짓말이다. 공정한 세상 가설을 믿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무의식 중에 ‘노력 원리주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따른다.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싸워가는 것이 우리의 책무고 의무다.
P.S. 수년 전에 쓴 글을 일부 수정한다. 강의하는 사람이나 조직의 관리자라면 읽어보면 좋겠다. 읽기 쉬운 철학 입문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