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베쏭 지음
‘습관’이란 단어에 나쁜 습관이 좋은 습관보다 먼저 떠오른다.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는 개인과 사회 분위기 탓이리라. 좋은 습관이 성취의 조건이고, 동력이란 걸 강조하는 책은 자기 계발서로 분류한다. 사람들의 습관에 관한 주목은 <감정도 습관>이라는 지점까지 와있다.
“초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금방 절판시켜 버렸다.” 개정판 역주자 서문의 첫 문장이다. 저자의 과단성과 넘치는 자신감이다. “번역의 나라 일본에서도 아직 번역이 안 된 책이라는 사실만으로 약간의 위로를 삼는다.”니 독자도 기대하며 읽는다. 책은 6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라베쏭의 생애와 업적. 습관에 대하여. 해밀턴, 철학적 단편들.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마지막 제36장. 파스깔의 철학. 형이상학과 도덕’이다.
<라베쏭의 생애와 업적> 베르크손이 쓴 글이다. 라베쏭은 철학과 예술을 함께한 뛰어난 철학자였다. 우주는 자유로움과 관용, 사랑에 의해 스스로를 주는 원리의 현상이라 한다. 교육에 관한 입장은 160여 년 전에 표명한 것임에도 울림이 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교육 체계는 관대함의 느낌에 자유로운 약동을 남겨두려는 경향을 가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악은 때로는 과도하기는 하지만 조건의 불평등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거기에 결합된 못마땅한 감정에 있다”라고 그는 이미 1887년에 썼다. “그 악에 대한 치유는 주로 계층 사이에 있는 상호 조화와 공감을 확립하는 도덕적 개혁, 특히 교육의 문제인 개혁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즉 자유로움을 발전시키고 영혼을 모든 노예성, 특히 그중 가장 나쁜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그렸다. 즉 “사회의 분할은 한쪽으로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지 공공을 위한 것이 아닌 부자가 있고, 다른 쪽으로는 스스로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부를 선망의 대상으로밖에는 생각지 않는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데서 태어난다.” 노동자 계층의 심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달려 있는 것은 부자들, 즉 상위의 계층이다. (이런 맥락은 특히 영국 현대 교육심리학에서도 받아들이고 있다.)
: 라베쏭은 그리기 교육에 대하여 ---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가야 한다는 페스탈로치로부터 영감을 받은 방법(이 또한 교육심리학에서 언급하는 학습 방법이다)에 대하여 이는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아이들에게 인간의 형태 중에 가장 완벽한 것들, 즉 희랍의 석상들이 제공하는 모델들을 그리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라고 제안하였다. 기계적인 것에서 구성의 길을 통해 살아 있는 것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습관에 관하여>는 1. 물질계는 형성된 습관이 없다. 2. 유기체의 습관, 수용성은 감소하며 자발성은 증가한다. 3. 하등 동물의 습관. 4. 인간의 습관에 대하여 논한다. 라베쏭은 물질계와 생명계를 나누고 생명계에서만 습관의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등동물일수록 자발적이고 덜 필연적이 되어 비로소 자유가 동튼다. 그렇게 되면 의식이 시작되고 거기서 지성과 의지가 나온다. 능동과 수동은 반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의식은 능동과 함께 발전한다. 반복에 따라 감각은 약해지고 지각은 강해진다. 습관의 필연성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고 매력과 욕망의 필연성이다.
습관과 본능의 차이는 무엇인가? 습관과 같이 본능은 의지도 의식도 없는 어떤 목적으로의 경향이다. 단지 본능은 더 무반성적이고 더 확고하다. 습관은 본능의 확실성과 필연성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다. 덕은 우선 피곤함이지만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매력이자 즐거움 욕망이 되며, 조금씩 성스러움에 접근한다. 거기에 교육의 비밀이 있다. 행동에 의해 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거기에 성향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제2의 본성이 된다. 습관의 원천인 자연적 자발성에도 습관의 법칙이 적용된다. 습관은 결국 자연적 자발성이 자유로까지 확장되는 역사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마지막 제36장에서 라베쏭은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분석과 종합을 들고 있다. “분석은 한 대상이나 관념을 그 요소들로 풀어 헤치는 것이며 그들의 재료로 해체하는 것이다. 종합은 반대로 사물들 속에서 재료들의 결합 방식, 즉 형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들이 다른 것과 어떻게 조합되고 합성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본질적으로 예술의 관점이다.” 유물론은 분석적 단순화의 길을 통해 우연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관념론은 특수하고 차이가 나는 성격을 우연적인 것으로 제거하는 일반화에 의해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다.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은 모두 허무주의로 향하고 있다. 하나는 분석해 봐야 결국 텅 빈 공간과 죽은 운동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물질이라는 허무로, 다른 하나는 공허한 일반 관념으로서의 존재라는 이름의 허무로 향한다. 이 두 허무주의를 피하는 방법은 허무가 아닌 살아있는 실재, 즉 생명의 구체적 실재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것이 정신적 실재론 또는 정신적 실증주의다.” “실증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이라는 철학이다.”
<파스칼의 철학>에서 역자는 사람들이 파스칼이 이성을 신앙의 제물로 삼음으로써 철학을 부정했다(“모든 철학은 한 시간의 노력을 기울일 가치도 없다.” “철학을 비웃는 것도 철학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철학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지성을 경멸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라베쏭은 철학과 종교가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밝힌 글이라 한다.
<형이상학과 도덕>에서 사람들이 “과학과 지식의 진보에 따라 형이상학이 사라져야 한다 하고, 형이상학자들은 추상적인 것으로 신을 대체하고, 현대는 종교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속상해하며,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된 형이상학의 진행 과정을 요약하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식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가장 교육을 덜 받은 자들의 몫”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해밀턴, 철학적 단편들>,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마지막 제36장. ‘파스칼의 철학. 형이상학과 도덕’에 대한 글은 <습관에 대하여>와 마찬가지로 역주자의 글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역주자가 각 장마다 역주 해제를 실어 독자를 돕는다. <습관에 대하여>는 자유문고에서 2016년 7월 초판 1쇄를 발행했다. 본문 377쪽 분량이다.
P.S. 2016년 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