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플라톤, 하이데거, 막스 베버, 한나 아렌트, 데카르트, 마르크스, 헤겔, 니체, 키케로, 카토,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하고 넘나들며,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사둔 지 일 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읽을 책으로 남겨 둔 상태다.)가 비중을 두고 인용된다.
샤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본질은 가능성에 불과하고, 이 가능성이 실현되어 현실의 개체적 존재로 되는 것이 실존이다.
제 때 죽어라. 이것이 니체의 가르침이다.
적시의 자리에 불시가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싸우는 자에게나 승리자에게나 똑같이 미움받는 것, 너희의 히죽거리는 죽음은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가온다. - 하지만 주인으로서 오는 것이다.
가속화는 시간의 댐이 무너진 상황의 가시적 결과다
전근대의 인간은 소여와 반복의 인간이다. 근대는 탈소여와 자유의 시대이다. 근대는 신이라는 이름의 ‘던지는 자’ 또는 ‘기투자’에 의해 초래된 피투성의 상태에서 해방된다. 근대는 목적지향적이다. 윕공간은 인간을 사색하며 머무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진리와 인식은 지속을 바탕으로 한다.
냄새와 향기는 광대한 시간을 거치며 과거 속 매우 깊은 데 까지 뻗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최초의 기억들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향기에서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유년의 우주가 깨어 일어난다.
향기는 이를테면 역사가 깃든 장소와 같다. 향기는 이야기를, 서사적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급함의 시대는 향기가 없다. 시간의 향기는 지속성의 현상이다.
간격과 문턱. 간격은 불확정성을 문턱은 고통, 괴로움이다.
중궁의 향인(香印) : 19세기까지 중국에서 사용된 향시계 – 중국에 가면 골동품가게에 가서 사오리라.
시간이 없다는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하이데거) 빠듯한 시간은 고유하지 못한 실존의 증상이다. 고유하지 못한 실존 속의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계에 빼앗기는 까닭에 신간을 잃어버린다. 단호하지 못한 자는 염려의 대상에게 분주하게 매달리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염려의 대상으로 인해 자기 시간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그런 이들은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계몽의 시대 이래 인간의 이성이 진보를 가져왔고,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사색적 삶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정반대이다. 한가로움은 기분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확실히 더 낫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 이러한 일에 대한, 노동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하였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고...... 막스 베버는 이윤추구의 욕망을 합법화했고, 그것을 신이 원하는 것까지 간주함으로써 거기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파괴해 버렸다.
산업화의 명령은 기계의 박자에 맞춰 인간을 개조하라는 시간경제학적 명령이다. 노동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은 활동적인 삶, 그것도 사색적인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삶이다. 사색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한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일하는 동물은 쉬는 시간만 알 뿐, 사색적 인식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토마스 아퀴나스 : 사색적 삶 속에서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피로사회]를 먼저 쓴 줄 알았다. 실은 [시간의 향기]가 2009년에, 피로사회는 2010년에 나온 것으로 주제가 연속된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2013년에 초판이 나왔고, 나는 2014년 6월에 나온 1판 5쇄를 본 거다. 본문 182쪽이지만 급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