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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Nov 10. 2024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투명사회’는 2014년 3월에 변역본 초판이 나왔다.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의 순으로 읽었는데 ‘시간의 향기’,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순으로 읽는 것이 한교수의 사고를 따라가는 순서다. ‘투명사회’는 ‘투명사회’, ‘무리 속에서(부제: 디지털 풍경들)’를 묶어 펴낸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투명사회]

투명사회의 일차적인 모습은 긍정사회로 나타난다.

투명성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속도에 도달한다.(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거부하는 까닭이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인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투명성에 대한 강박은 인간마저 평준화하여 시스템의 기능적 요소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 이에 비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음으로.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이며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전시사회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시의 강요는 아우라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전시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대상으로 삼는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이다.     


포르노사회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가속사회

오늘날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산과 해체에 있다. 시간은 붕괴되어 점점이 원자화된 현재들의 연속으로 전락한다. 원자는 향기가 없다. 원자는 비유의 매력과 서상의 중력을 통해 비로소 향기를 가진 분자로 통합된다. 서사적 구조물은 향기를 발산한다. 느리게 살기로는 공허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친밀사회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의제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 사회이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정보사회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폭로사회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은 진리와 고백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특징적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을 드러낸다.

디지털 투명성은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마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주목도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     


통제사회

디지털 파놉티콘은 비원근법적으로 투시 촬영한다. 모든 것이 전범위적으로, 도처에서, 모두에 의해 훤히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밴텀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들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했다면,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무리 속에서]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이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이다. 디지털 매체는 아날로그적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감정매체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탈매개화

정신의 매체는 고요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은 고요를 파괴한다. 스마트폰은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복합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투명사회를 읽어가며 내가 속해있고, 빠져 있는 바다의 깊이를 글로 멋지게 풀어낸 것에 감탄한다. 또한 내가 의식한 것과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카카오톡의 대화가 검열되는 뉴스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공권력의 감시라는 비판과 이로부터의 도피, 사이버 망명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읽게 된 것이 우연인지......     


투명사회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2014년 4월에 내놓은 것으로 본문 235쪽이다.     



P.S. 2014년 10월 9일 오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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