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세 번째
60분 분량 제한으로 공유하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꿉니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온다 (동양편) 5,800자
고대 중국인의 인생살이
고대 중국 사람들의 인생을 보는 관점은 어떤 모습일까?
<사기본기>는 사마천이 궁형을 감수하고 종이도 아닌 죽간에 써낸 중국 상고사다. 죽간이나 목간은 너비가 겨우 3㎝ 정도, 길이는 삼십 센티미터 정도인 대나무 쪽이다. 기록할 수 있는 글자 수는 이삼십 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사기본기>를 읽을 수 있으니 사마천의 삶은 행복하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궁형이라는 고통과 시련에 비중을 두어 평가해야 하는가?
중국의 삼국시대인 위, 촉, 오나라의 대립과 승패를 다룬 소설 삼국지연의와 이를 기초한 대중매체는 조조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조조보다는 촉나라 유비 현덕과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와 제갈량의 역할을 강조한다. 조조의 삶과 유언을 살펴보면 억울할 듯하다. <正史 삼국지 魏書 1>의 武帝記에 따르면, 조조는 66세로 붕어하기까지 혼란한 후한 말기에 천하를 평정하려는 일념으로 살았다. 생전에 황제라 칭한 적이 없으며, 유언을 통해서 그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으니 유언을 옮겨보면,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또 고대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매장이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병사를 통솔하며 수비지에 주둔하고 있는 자가 부서를 떠나는 일은 허락지 않는다. 담당 관리는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하라. 시신을 쌀 때는 평상복을 사용하고, 금은보화를 묘에 넣지 말라.’
조조는 오히려 둔전제를 시행하여 전란기 굶주린 백성들을 살폈고, 배반한 적일지라도 효를 행한 자라면 살려주고 있다.
<정사 삼국지 위서 2>에서 ‘전설적인 명의’ 화타가 행한 진료 이야기는 신기하고 재미있다. 화타가 아내의 병을 핑계 삼아 조조 곁을 떠나 있을 때, 조조가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화타를 평하고 나중에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 화타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까?
<정사 삼국지 촉서>를 보면 인생에는 결단의 시기가 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언하기를 ‘만일 후계자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으면 당신 스스로 취하시오.’ 유비는 태자인 유선과 신하인 제갈량을 동등하게 보고 말하고 있다.
먼저 승진한다고 끝까지 상관이 될 수는 없다. 앞서거나 뒤지거나 하는 것이니 뒤설 때 섭섭해하지 말아야 한다. 섭섭하면 고통과 시련으로 여기게 된다.
명 청대 중국인의 인생살이
중국에서 명 청대 이후부터 현대 중국인이 보는 인생은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명청청언>은 소품집으로 “마땅히 끝까지 힘을 쏟아야 할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책 읽는 것과 자신을 이기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한다. 책을 읽는 것과 자신을 이기는 일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이라고 본다.
<이탁오 평전>을 읽으니, 기득권층은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인 이탁오를 투옥시켰다. 세상을 조용하게 하고 그를 세상에서 잊히게 할 줄 기대했으나 현실은 반대가 되었다. 수많은 지기와 학자들이 그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명말부터 청조까지 공맹의 사상으로 물들여진 중국에서 봉건시대의 문화 전체주의에 반하는 민본과, 자유를 부르짖은 이탁오의 사상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1980년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단다. 이탁오의 인생은 행복과 불행 중 어느 편일까?
<천연론>에서 테니슨의 시를 옮겨 놓았다. 행복과 불행이 혼자가 아니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한다.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망망한 바다에 풍파가 인다.
깊은 바다에 침몰할 수도 있고 신선이 사는 곳에 이를 수도 있으리라.
장차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시간이여 시간이여 나는 나의 힘을 다할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장부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로다.”
<루쉰 소설선> 중 단편소설 ‘고향’의 맨 끝부분은 너무도 잘 알려진 글이다.
" (중략)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서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에는 황금빛 둥근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
루쉰은 희망을 만들어 행복해지자고 한다.
<중국인 이야기 3>에 혁명의 정신적 지주 위유런이 임종 전 애가(哀歌)를 소개한다.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곳
대륙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오직 통곡뿐!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두고 온 내 고향 볼 수 있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
하늘은 아득히 창창하고, 들판은 끝없이 망망한데
산 위에 올라보니, 온 나라가 상중이다.”
위유런은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인재 쟁탈전의 0순위였고 한다. 그의 삶은 어떠한가?
일본인의 인생살이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만엔원년의 풋볼>을 쓴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천황이 주는 훈장을 거부했다. 일본 우익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그가 패전 후 서양식 교육(프랑스 문학)을 받은 영향이었을까?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근대 문학에서 우뚝 서 있는 소설가이다. 겐자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은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하여 한계를 알아야 가능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은 언제 어느 때 일어나도 괜찮은, 삶의 연장선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장하려면 적어도 한 번은 익숙한 지점에서 빠져나와 그것들과 단절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혼자인 시간은 피할수록 더 괴로워진다. 고독을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라 한다. 교양은 고독에 대한 처방전이다. 독서에 익숙해지면 고독에 짓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책을 읽어 고독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삶이 행복한 인생으로 가는 길이란 거다.
한국인의 인생살이
한국인이 보는 인생은 어떠한가?
<언행록>은 율곡 이이가 처음 급제하였을 때, 승문원에서 선배들에게 공손치 못하다고 보고하여 파직을 당했다고 기록한다. 그 소식을 듣고 퇴계 이황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씌워서 괴롭히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줄 알고서 이 길로 들어섰으니, 어찌 혼자만 면할 수 있겠는가? 이 군의 일은 어찌 그리되었는지 모르겠으나, 후배 중에서 혹시 기를 숭상한 나머지 사람을 얕보고 오만하게 선배를 대하며 제멋대로 말을 듣지 않은 일이 있다면, 듣고 보기에도 놀라울 뿐 아니라 의리에도 마땅치 않다.”
조선조의 대학자이자 고위 관료였던 율곡도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조선 역대 이래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자는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대왕 양대뿐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단재는 고리타분한 사학자가 아니었다. 베르그송을 말하고 이집트의 지리를 알고 있었으며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신학문에도 조예가 있는 학자였다. 우리는 근구수왕과 동성대왕, 단재를 잊고 산다. 잊힌, 기억하지 않는 삶도 인생이다.
<광장>에서 듣는 문장이다. 낙동강 전선의 동굴에서 은혜가 명준에게 한 말이다.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네?” 가슴이 짠하다. 이 순간은 행복과 불행이 겹쳐있다.
<직언>에서 데카르트가 제시한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천원칙도 스토아 철학에서 나왔다.
“언제나 부를 정복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기본의 질서보다는 나의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자기 생각 이외에는 그 무엇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믿으며, 그럼으로써 외적 문제를 해결하려 최선을 다한 후에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라.”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변화란 무엇인가 묻고 답한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이다. 1년 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1년 동안 죽어 있었다. 만일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난 24시간은 당신에게 죽어 있던 시간이다. 의미 있는 생각과 행동으로 변화할 때 불행과 멀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법륜 스님은 <인생 수업>에서 부정적인 것을 보면 긍정적인 것을 찾고, 단점이 보이면 장점을 찾으라 한다, 꼬인 실타래를 푸는 시작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으라 한다. 인생의 행과 불행은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확인한다.
<에디톨로지>에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평가를 보자. “프로이트는 사기꾼이었으나 그런데도 위대한 편집가였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나르시시즘, 억압, 트라우마, 리비도, 투사, 치환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만들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편집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한국 문화 심리학자에게 프로이트는 과대 평가된 학자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모두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를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라고 말한다. 인생은 누가 어떻게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어설픔>의 프롤로그는 ‘그대가 아프기를 바랍니다’이다. 한의사가 상대에게 아프길 바란다는 게 환자로 와서 돈을 쓰고 가란 뜻이 아니다. 아프면 자신을 되돌아보고 쉬게 된다는 거다. 경쟁 사회 속에서 아웅다웅 살면서 찌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기에 ‘아픔은 한 가지 수단’이란 의미다.
<탈무드에서 인생을 만나다>는 경제력이 흔들리면 가정도 흔들린다고 말한다. 어려운 시기도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사람이 한층 더 성숙해진다. 자신감과 자부심도 커지고 겸손해진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조합이다. 부자란 즐길 수 있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며 고난은 바라보기 나름이란다. 행복과 불행은 마지막 순간에야 알 수 있다. 강한 욕망이 영혼을 더럽힌다. 작은 선행을 반복하라. 등 수많은 조언을 건넨다.
<여덟 단어>는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행복은 삶이 끝나갈 때쯤에나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행운이라 굳게 믿고, 나쁜 일이 있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병가지상사를 떠올려라. 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 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직조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놓고 미래를 기다린다. 치고 들어오는 날줄의 모양새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뤄내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산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보나파르트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 라 한다.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은 우리의 갖가지 괴로움과 불안, 불만족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 맞는 원인이 있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이 합쳐져 고통이 생긴다. 고통은 영원한 게 아니다. 조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임으로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면 없앨 수 있다. 그래야 자유와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 스님의 조언은 연기론에 따른 것이다.
수년 전 텔레비전에서 “행복하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에 행복해야만 하고,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줄로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마치 부자가 행복의 조건이고 부자가 아니면 불행하다는 어불성설한 상황이 생긴 거다. 2023년 <세이노의 가르침>과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을 많은 독자가 읽는다. 현실을 자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방증이다.
53권의 책을 읽어가며 인생이란 어떤가를 살펴보면 동양과 서양, 과거나 현재에 공통된 지점이 있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의 주체는 자신이며 행복과 불행은 함께 존재한다.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이라는 불행을 이겨내는 것이 행복이다. 불행도 시간이 흐르면 크기가 작아지고 잊힌다.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