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충덕 Oct 07. 2023

개인이나 국가나 먹고사는 문제가  0순위다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15,000자)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네 번째(15,000)    

 내용이 딱딱하고 길으니 차 한잔 준비하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개인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꿈꾸고, 국가가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는 일은 동양이나 서양 어느 곳이든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는 문제다. 풍요로운 삶과 부국강병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이를 경제학이라 이름 지어 내용을 대강 추려 줄여본다.

 첫째, 경제학의 주류는 중상주의, 중농주의, 중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자유 방임주의, 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진다. 둘째, 세계 경제를 이끄는 미국 경제의 물류 혁신을 이끈 컨테이너화, 선진국 경제의 어두운 면에 주목한 <축출 자본주의>를 살펴본다. 셋째, 비주류로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에 초점을 맞춘 후생경제학 혹은 빈곤 경제학의 흐름을 살피고 넷째, 한국 경제의 현안을 중국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먹고사는 문제가 0순위라는 문제의식에서 정책 결정에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펴본다.     


주류 경제학

   중상주의는 15세기경부터 18세기까지 유럽 절대주의 시대를 이끈 경제 이론이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은 제한하고,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국제 무역이 증가하는 가운데 국가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에서 생겨난 경제 이론이 중농주의이다. 국가의 부는 농업의 가치에서 발생하니 농산물 가격을 높게 책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생산물을 국부의 원천이라 보았다. 상품이나 용역의 생산은 진정한 생산이 아니라는 관점을 취했다. 노동을 가치 발생의 원인으로 본 것이다.

   이어지는 경제학의 주류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 밀턴 프리드먼을 통해 자유 방임주의, 정부의 재정정책으로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 신자유주의로 이어진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시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을 결정하여 수요와 공급을 조절한다고 본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 방임주의는 어떻게 생산력을 확대하고 부를 증가시키며, 부를 분배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측정하는 가치를 노동에 두는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한다.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국가가 무역을 통제하던 중상주의를 무너뜨렸다. 맬서스나 리카르도는 자유방임주의자로 분류한다.

   케인스 경제학은 총수요가 경기순환을 결정하고 경기순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재정정책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급 과잉이 경제 공황을 만들자 케인스는 수요를 유발하는 재정정책으로 경제 공황을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총지출과 총생산이 균형을 이룰 때 케인스 적 균형이라고 한다.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선진국은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계승한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로운 시장 경제의 확대로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학이 주류를 형성한다. 재정정책의 한계를 인식한 밀턴 프리드먼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의 주장을 계승한 이론을 재정주의,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을 통화주의라 한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자유로운 시장 경제의 확대를 케인스 경제학이 몰락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금융거래에 과세하는 징벌적 세금인 토빈세를 주장하고, 주식투자에서 ‘달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지 말라’로 설명하는 포트폴리오 이론을 주장한 제임스 토빈의 생각은 케인스의 생각과 맥락이 닿아 있다.

   주류에서 비껴있는 아마르티아 센과 경제지리학을 개척한 폴 크루그먼도 주목받아야 한다. 주류의 경제학은 미국과 영국이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고, 인간은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제인이라 하고 국가 경제의 성장과 불황을 다룬다. 인도인 아마르티아 센은 후생경제학의 관심사인 빈곤, 기아, 불공정한 분배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을 다루는 비주류이다. 폴 크루그먼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에 따른 무역을 제치고, 수확체증이라는 규모의 경제를 토대로 공간을 경제에 포함한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경제지리학을 개척한 것이다.

   이밖에도 게임이론으로 전쟁과 인간 사회를 읽어 낸 로버트 아우만과 토머스 셸링, 인간은 합리적 의사 결정만 하는 게 아니라는 심리실험연구로 경제학의 지평을 확대한 대니얼 카너먼 등도 현대 경제학을 이해할 때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길게 잡아도 2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학문이다. 고등학교 수준의 경제교육에서 중상주의, 애덤 스미스와 케인스까지가 경제학이 다루는 범위이다. 경제학은 심리학, 지리학, 실험경제학, 행동경제학 등의 학문과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실제적 삶과 깊게 연관되어 있으니 학교의 커리큘럼은 수정 보완될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와 계획경제

   고등학교 수준의 경제교육 범위에서 벗어난 경제 이론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국가의 출현은 충격이었다. 한때 계획 경제 체제는 자유주의보다 효율적인 체제로 보이기도 했다. 1944년의 시점에서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종국에 무너지는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고, 자유주의 경제야말로 경제의 흐름이 될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노예의 길>에 밝혀 두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하이에크는 영국에 퍼져있던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가 사회보장, 안전 등의 이름으로 인기를 얻고 있음을 우려했다.

   자유주의 경제의 전제인 ‘시장’이란 합리성을 지닌 개인들이 경쟁을 통해 효율적인 생산방식과 소비자의 제품에 대한 수요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에 비해 계획 경제는 중앙이 생산을 통해 소비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이 개혁과 개방으로 나섰으니 계획 경제 체제를 운영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예의 길>이 이제는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 고전이 되었다.

   하이에크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제 뜻에 따라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시도가 허용된 체제로 전환된 것은 상업의 성장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정치적 자유가 경제활동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져왔고, 과학의 경이로운 성장까지 이끌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이는 20세기 초 물질적 안정과 개인적 독립을 누리며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까지 믿게 되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관점은 독일의 사회주의 발전과정과 비교하며 사상적으로 대립한다. 다음은 <노예의 길>이 설명하는 사상의 흐름이다.

   독일에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헤겔, 마르크스, 리스트, 좀바르트, 만하임 등에 의해 20세기 초 독일에서 사회주의가 절정에 달한다. 20세기 초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대신하여 대다수 진보주의자의 교리가 되었다. 사회주의의 기초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란 의도적으로 사회를 위계적인 방식으로 재조직하고, 강압적 ‘정신력’을 강제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의미했다. 사상의 자유를 19세기 사회의 근원적 악으로 간주하였다. <노예의 길>에서 언급하는 서구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라인강 서쪽을 의미한다. 서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자유무역과 모든 형태의 국제주의와 평화 애호를 의미한다. 이를 보는 라인강 동쪽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을 영국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만든 교리에 불과하고 영국이 세계에 준 정치적 이상들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자유주의의 주장은 인간의 노력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경쟁의 힘을 가능한 한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것이다.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경쟁이 유효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때만 확실히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계획경제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지 않았다. 공정하고 평등한 부의 분배를 확보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에서 사회주의는 개인적 삶보다 민족의 삶과 국가의 삶을 더 중시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1차 대전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전쟁으로 보았고, 20세기 초 사회주의는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있었다.

   < 노예의 길>이 맺은 결론은 명확하다. ‘지도’하고 ‘명령’ 하기 위한 기구를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라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 진리였듯이 현재도 여전히 진리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 방임주의 경제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로 이어지고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계승돼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이르게 된 경제학사를 본다.  

    


신자유주의와 제3의 길

   밀턴 프리드먼은 <노예의 길> 출간 50주년이 되는 1994년에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권을 강조하고, 거의 완전한 자유주의 정책이 보편화되었다”라며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코로나 19를 경험하며, 미국의 건강보험 프로그램보다 한국의 건강보험 프로그램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됨을 누구나 느끼고 있으니 프리드먼의 주장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다.

   토크빌은 “사회주의는 예속을 의미한다”라고 경고한다. 현대 서구 문명의 기초는 개인주의이다. 인간으로서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 즉 “그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그 자신의 영역에서는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신념이다.

   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파고는 경제의 세계화란 물결에 올라탄 이후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경제 공황의 대책으로 ‘통제’라는 방식을 제안하여 자본주의의 성장을 이끈 케인스 경제학 못지않은 폭과 깊이를 갖게 되었다. 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민주화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다르지만 ‘사회성, 공동의 것의 우위성을 옹호한다’라는 차원에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에 성찰을 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앤서니 기든스가 말하는 <3의 길>을 살펴본다.

   

   제3의 길은 포괄적 복지에서 근로 복지로의 이행을 거쳐 적극적 복지를 지향한다. “복지국가의 복지가 소득의 재분배였다면 제3의 길은 노동의 재분배”라고 말할 수 있다. 기든스의 사상은 동양식 사고로 보면 중용이 길이다. 제3의 길은 좌파에게 백기를 든 것 같다고, 우파에게는 악의 근원인 복지국가에 집착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좌우를 극복하자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흑백 논리가 중용을 지켜 내기보다 쉽다.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발전국가’의 불균형 전략을 펼쳐 온 우리 관점에서 고민해 볼 과제가 아닐까. 제3의 길은 경제 영역에만 제한된 사고가 아니다. 정치, 경제, 교육, 시민사회, 가족제도 등 여러 개념을 결합한 접합개념이다. 정치는 세계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제3의 길은 평등, 약자 보호,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책임 없이 권리 없다, 민주주의 없이 권위 없다, 세계주의적 다원주의, 철학적 보수주의라는 가치를 지향한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는 신혼합경제를 지향한다. ‘사회투자 전략’이란 개념이 생소하나 적극적 복지를 강조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제3의 길에서 새로운 정치는 평등을 포용으로, 불평등을 배제로 규정한다. 

   제3의 길의 핵심은 노동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다른 영역에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노동의 기회가 보장될 때 인간은 자존감을 느끼고 생활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미국 경제와 혁신

   세계 최고 강대국인 미국의 경제 정책과 상황은 국제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다국적기업이 국경을 초월해 경제활동을 주도하는 세계 경제 체제에서 미국 경제의 변화를 살펴보는 일은 세계 경제를 이해하고 방향을 가늠하는 데 필요하다.

   <직업의 지리학> 1970년대 후반 제조업의 쇠퇴를 경험하며 미국의 경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살핀다. 노동경제학과 도시 경제학의 관점에서 제조업의 흥망 이후 변화의 모습을 양극화, 집적이익, 노동자의 이동성과 생활비의 불평등으로 분석한다. 빈곤의 덫에 빠진 도시와 매력적인 도시를 견주며, 혁신의 원천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임을 강조한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포디즘의 절정에 있던 30년간 텔레비전 소유 가구 비율 2%이던 미국은 중산층 국가가 되었다.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 덕분이었다. 이제는 제조업 고용 비중이 10% 이하로 줄었다. 디자인, 마케팅, 판매 부문만 미국에 남았고 저임금 국가로 생산시설은 옮겨 갔다. 고급 수제품 같은 틈새시장만 남았다. 기술 진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은 일자리를 줄이지만 생활 수준을 높인다. 생산성 향상만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든다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과 같이 혁신과 기술 발전이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는 동인이다.

   현재 미국의 노동 시장은 양극화되어 있다. 제조업을 되살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다. 거대한 역사의 힘은 거스를 수 없다. 포디즘 시대의 호황을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도 유지하려면 ‘혁신’이 중요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자신의 역할에서 특출한 사람은 꽤 잘하는 어떤 사람보다 단지 약간 나은 것이 아니라 100배 낫다”는 마크 저커버그 말은 혁신을 강조하는 거다. 혁신 부문이 전체 고용 가운데 다수가 되지는 못하지만, 비교역적 부문의 승수효과가 제조업보다 크기 때문이다. 승수효과란 정부 지출의 증가처럼 어떤 변화가 촉매제 역할을 해 결과적으로 총변화량을 몇 배나 더 큰 폭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이른다. 첨단 기술의 승수효과가 큰 이유는 첨단 기술 노동자의 보수가 후하고, 직장과 집이 가까이 자리 잡는 경향 때문이다. 혁신은 연구와 개발이 필요한 고정비용이 중요하다. 혁신에 지리가 중요한 이유로 연결된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이 제조업의 종말을 가져온 원인이자 혁신 부문의 일자리 창출 요인이기도 하다.

   혁신의 중심지들이 끌어당기는 힘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답을 내놓는다. 혁신기업의 시각에서 바라본 집적이익은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두터운 노동 시장이 있어야 혁신할 수 있다. 장소가 중요한 까닭은 기업과 벤처 캐피털이 지리적으로 인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는 지식 확산에 중요하다. 지역 내 상호작용은 거리가 멀면 원활하지 않다. 혁신이 일어나는 클러스터는 일단 만들어지면 이전하기 어렵다. 경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좋은 일자리도 미래에 안 좋은 일자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처음 인식했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자본주의 성장의 원동력으로 지적했다. 잠금 효과를 깨트리는 창조적 파괴가 혁신의 특징이다.

   엔리코 모레티가 “급여는 이력서보다 거주지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라는 문장으로 미국의 양극화를 풀어간다. 미국의 임금 격차가 사회적 계급 못지않게 지리와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웃의 학력이 자신의 급여에 영향을 미친다는 문장은 인적자본의 외부효과를 설명한다. 외부효과란 금전적인 거래 없이 어떤 경제 주체의 행위가 다른 경제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효과 혹은 현상이다. 이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등교육이 소득, 건강과 죽음, 이혼과 정치참여, 자선 기부의 양극화로 연결됨을 통계로 보여 준다. 양극화는 우연이 아닌,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경제적 힘들이 만든 결과다.      

   미국 경제에서 노동자의 이동성과 생활비의 불평등을 다룬다. 이주는 투자와 같다. 가난한 사람들은 출퇴근 비용에 부담을 느껴 고용 기회가 더 낮아진다. 적합한 일자리가 많은 곳으로부터 거리가 먼 곳에 거주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질 기회가 줄어만 간다. 경제적 불평등은 부동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직장·주거 분리 패턴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빈곤의 덫에 빠진 도시와 매력적인 도시는 어떻게 다를까? 혁신하고 매력적인 도시는 뛰어난 스타급 학자를 초빙하기도 한다. 플로리다는 창조계급의 비중이 커야 한다고 말한다. 창조계급이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역동성을 창조하는 전문적, 과학적, 예술적 노동자 집단을 말한다. 대학의 존재도 매력 있는 도시의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보조금 지원, 과세 혜택도 매력적인 도시를 형성하는 조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진보적 도시 사상가인 제인 제이컵스는 지원정책에 대해 “실제 그 효과는 비참할 정도이다”라고 저평가한다.

   세계화와 기술 진보의 시기에 혁신적인 인적자원과 혁신기업들을 끌어오는 경쟁이 심해질 것이다. 지리의 중요성과 뭉침의 힘(집적)의 더 중요해질 것이다. 놀라운 것은 “연구·개발의 사회적 수익률은 약 38%로서 민간 수익률의 거의 두 배이다”라는 문장이다. 고학력 교육이 중요하다는 근거다. 고학력자의 이민에 의존하는 미국의 경향을 토대로, 우리나라로의 이민을 보는 시각을 점검할 때가 이미 지난 것은 아닌지 살펴볼 때다.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 경제

   20세기 후반 전개된 세계 경제 형성의 이해 과정에서 물류 혁신을 다룬 <THE BOX>와 선진국 경제의 문제를 다룬 <축출 자본주의>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경제 수준은 세계 10위 안쪽에 있다. 누구나 A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거나, B 대통령 때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거나, C 대통령 때 수직적 문화가 수평적으로 됐다느니 이야기한다. 현재를 만든 과거 여건, 동력에 대한 논의는 학문의 영역일지 모른다. <THE BOX>는 부제가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이라서 평론가는 학문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대서사시다. <THE BOX>는 컨테이너가 어떻게 물류 혁신에 이바지했는가를 설명한다.


   컨테이너가 사용되기 전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운송과정 때문에 해외로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송비에서 가장 비쌌던 부분은 자국 항구에서 배에 짐을 싣는 과정과 바다 건너 항구에서 배의 짐을 내려 트럭이나 기차에 싣는 과정에서 드는 인건비였다. “6,500km에 걸쳐 짐을 운반하는 데 드는 총비용 중 50%가 두 항구에서 짐을 부리고 옮겨 싣는데 드는 비용이었다.” 현재는 대형 크레인으로 1개 컨테이너를 싣거나 부리는데 1~2분이면 충분하다. 하역시간 2주를 반나절로 줄인 것이다. 하역비의 비중이 무시할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컨테이너화라는 물류의 혁신은 수출과 수입의 확대로 이어졌고, 하역노동자들에게는 실업의 계기가 되었으나 소비자들에게는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컨테이너 덕분에 세계 무역이 보편화되고, 소비자들은 다양하고 많은 제품을 한자리에서 비교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화물 운송 작업은 수백만 명이 종사하는 도시산업이었다. 컨테이너를 사용하게 되면서 뉴욕의 브루클린이 1971년 무역항으로 누리던 과거의 영광을 뉴저지주의 뉴어크, 포트엘리자베스 항구로 빼앗긴다. 뉴욕의 발전과 정체 과정에 고속도로의 영향이 있었으나 컨테이너가 이끈 변화는 뉴욕 제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컨테이너 산업이 도입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범위에 걸쳐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하역 인부이자 철학자인 에릭 호퍼도 변화에 저항했다. 항구의 기계화 및 현대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하역 인부들과 노동조합은 선사와 힘겨루기를 거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서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컨테이너의 표준화 과정이다. 컨테이너의 크기에 대한 철도회사, 트럭 운송회사, 해운회사의 표준이 달랐다. 10여 년간 표준화를 위한 정부와 기업 간 협의를 거쳐 1968년에 길이 6m를 1 TEU로 정한다.

   컨테이너 보급의 막강한 후원자는 베트남 전쟁을 치르던 미군이다. 1969년 기준, 54만 명이라는 미군을 먹이고 재우고 생필품을 보급해야 했다. <THE BOX>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말콤 맥린의 기업가적 감각은 베트남에 화물을 내리고 가는 텅 빈 컨테이너선을 일본에 들러 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68년이면 일제 TV, 스테레오를 컨테이너에 가득 채워 태평양을 건넌다.

   컨테이너화는 지역적 한계를 탈피할 기회를 주어 서부의 시애틀,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가 신식 부두를 건설해 성장을 따라간다. 유럽에선 런던과 리버풀은 무역항의 역할이 줄고, 로테르담이 빠르게 성장했다. 아시아에서 요코하마, 고베, 도쿄, 홍콩이 항구의 컨테이너화에 동참했다. 2005년에는 약 5,000군데 국제 회사가 싱가포르를 컨테이너 화물 무역 중심지로 사용했다. 타이완의 에버그린 해운선사는 1982년에 2,700 TEU의 컨테이너를 싣고 세계 일주 화물 운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이후 해운업계는 더 큰 컨테이너 화물선이 건조되고, 1분에 1개 컨테이너를 옮길 수 있는 대형 크레인이 속출했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JUST IN TIME 시스템’(적기생산방식)은 경제적 효율과 품질 향상을 이루어낸다. 이는 컨테이너 화물 운송 없이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JIT가 수월해졌다. 컨테이너 화물선은 세계 경제를 연결한다. 경제의 세계화, 노사 관계와 고용, 통상과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이 무역 국가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단순한 12m 길이의 직육면체 BOX 컨테이너가 놓은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이다.     


세계화된 경제의 그늘

   사스키아 사센은 <축출 자본주의>를 통해 복잡한 세계 경제가 낳은 잔혹한 현실에 주목한다. 세계 경제는 네트워크화되어 뉴욕의 증시가 코스닥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석유와 곡물에, 스타벅스와 햄버거, 코카콜라가 연결되어 있다. 양극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극단에 있는 사례들로부터 통계자료와 경험적 연구를 통해 ‘축출(expulsion)’이란 개념을 꺼내고 자본주의를 분석한 사스키아 사센을 만난다. 축출이란 “지난 20년 동안 많은 사람과 기업, 장소가 우리 사회 경제의 주요 질서로부터 퇴출”당하였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사센의 연구에는 국가가 주도하던 케인스주의와 평등, 공정사회 확립이라는 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다. 서구에서 시작된 다(초) 국적기업의 성장이 전통적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간다. 이는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의 문제라는 지역적 관점은 과거의 시각이며, 문제는 연결되어 있고 전 세계로 확산한다.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고 다국적기업의 활동이 세계의 경제를 이끌어 간다.

   케인스주의적 논리는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금융의 세계화’를 무기로 단순한 진보, 발전, 진화가 아닌 약탈적이라는 특성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노동자와 소비자로서의 가치를 잃고 사회적으로 배제(축출)되며 궁핍해진다. 남반구 후진국들은 다국적기업에 국가 경제를 열어두다 보니 외채 상환을 우선 과제로 삼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업이 사들인 해외토지가 급격히 늘어 국가가 경영하기보다는 기업이 자원을 착취하는 공간이 되어 간다.

   이렇게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땅과 물이 방대한 규모로 죽어간다. 축출은 고도로 발전한 선진경제와 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사스키아 사센이 축출의 동력원으로 보는 것은 ‘금융의 세계화’이다. 과거에 은행은 자신이 보유한 자산을 외부에 판매한 것에 비해 현재 금융회사는 그들의 수중에 없는 것을 판매한다. 이는 케인스식 경제 성장과 결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다. 즉, 성실한 노동 계층과 중산층의 확장을 기반으로 성장하던 시대와는 확연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다국적기업의 영향력은 커가고 탈산업화, 금융의 국제화로 중산층이 몰락하고, 오직 글로벌 도시, 세계도시만이 권력과 힘을 발휘한다.

   또한, 사센은 80년대 이후 무역장벽 철폐와 민영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 시장으로서 땅에 주목한다. 외국인의 땅 매입은 대규모 축출을 일으키고 상품화되어 주권국가의 영토가 국제 시장의 판매대에 진열된다. IMF, WTO, 세계은행의 역할은 지역 경제를 변화시키고 주권국가의 영토권을 훼손하고 있다. 한국에서 느끼기 어려우나 외국인이 매입한 땅은 아프리카, 동남아, 남미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후생경제학

   경제적 불평등에 주목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비주류 경제학은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헨리 조지와 아르마티아 센이 생각하는 경제와 슈마허의 적정 기술까지를 살펴본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부가 증가하는 물질적 진보가 일어날수록, 왜 임금은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빈곤이 발생하는지 묻고 답을 찾는다. 1879년 헨리 조지는 이 문제의 원인은 바로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인구증가와 기술 개선 때문에 상승하는 토지 가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해결책으로 토지 가치를 정부가 환수하고, 그 대신 다른 조세를 면제하는 지대조세제를 제안한다.

   인도의 경제학자 아르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경제 성장이란 GNP 혹은 GDP를 키우는 것이 경제 발전이라는 관점에 태클을 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먼저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분배나 복지를 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분위기다. 정권이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성장과 복지가 시소처럼 움직인다. 다행스럽게 파이의 크기를 키워도 낙수 효과가 그리 효과가 없음을 알게 되면서 분배와 복지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바뀌는 듯하다. 아르마티아 센은 ‘가난한 나라도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높아지기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공공정책을 실시하면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교육과 보건에 대한 투자가 경제 성장에도 이바지할 수 있으니 가난한 나라라도 사회적 제도 개선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선진국이며 우리 눈에는 경제에 관해 같은 입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센은 유럽과 미국을 비교하여 그렇지 않다고 알려준다. 미국은 아프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을 제한하는데 이는 유럽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럽의 복지국가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보건부터 교육제도에 이르는 공공시설에 대한 사회적 투입은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럽에서 감당하는 두 자릿수의 실업은 미국에서 정치적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경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경제 발전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진보와 보수가 자기주장만 되풀이하고 서로의 주장을 듣지 않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는 힘들다.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평등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상황이다. 양적인 성장보다 조금 늦더라도 질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고, 파이의 크기를 키워 낙수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분배와 복지에 비중을 둘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경제학자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통해 개발에 따른 파괴를 우려하면서 ‘적정기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적정기술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인간의 삶과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적정기술 제품으로 라이프 스트로(life-straw)와 같은 구호제품, 수동식 물 공급 펌프와 같은 농업 관련 기술, OLPC(one laptop per child)사의 XO-1 컴퓨터와 같은 교육용 제품 등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적정기술은 큰 자본이 필요하지 않고 간단한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적정기술은 빈곤 국가의 사람들을 위해 연구되고 사용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슈마허의 책에서 희망과 용기를 찾고, 파괴되어 가던 라다크를 살리려고 ‘라다크 프로젝트’를 실천 사례다. 지구촌은 전 세계 경제통합이란 시각에서 이익의 무한 추구를 꾀하는 정부와 산업계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계 경제 체제는 분명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를 파괴하고 소비 지향적 획일성 문화로 대체함으로써 건강한 정체성의 근본을 훼손시킨다고 본다. 우리를 위협하는 환경재난과 사회 붕괴 현상을 막으려면 하나의 모습으로 통일된 지구촌을 포기하고, 세계화 경제의 대안으로 지역 중심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 출신의 주류 사상가들이 서구와 산업화의 경험을 보편화하려는 경향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다. 경제 개발과 자본의 힘은 전문화와 집중화, 에너지 집약적인 생활방식 쪽으로 세계를 몰고 가는데, 이제는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거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

   끝으로 중국과 한국의 경제가 이미 긴밀하게 연결되었는데 경제 환경은 미·중 무역분쟁 탓에 전망이 어둡다.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 100년의 꿈 한국 10년의 부>는 2016년 중국의 경제를 거시적으로 소개하며, 한국이 살길은 중국의 성장이라는 용에 올라타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중국이 부동산 개발로 성장을 유지해 왔다는 최근 뉴스가 지속적 성장 가능성에 의문이 들게 하고 있다. 더구나 2023년 중국과 미국을 둘러싼 국제 경제 상황이 이전보다 더 복잡해졌다. 무역분쟁이 정치적 영역까지 번졌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일이다. 책이 출간된 10여 년 전의 메시지가 유효한 부분이 있으므로 미·중 무역분쟁을 고려하여 살펴본다. 2016년의 시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중국을 포기하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란다. ‘한국은 중국에 가까이 있고, 워싱턴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잊지 말자.’라는 도올 김용옥과 같은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걱정하고 전환을 요구한다. 두 저자의 관점이 역사와 정치라는 시각과 경제라는 시각으로 출발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다.

   미국은 2위 강국이 미국 GDP의 40~50%를 넘어서면 예외 없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어 2위의 힘을 뺐다. 식량, 석유, 통화의 장악이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방법이다. 1971년 금본위제 폐지 이후 선진국의 신용확대는 해외 자본에 크게 의존했다. 중국은 자금과 시장을 무기로 전 세계의 드론, 인공지능, 가상현실, 지능로봇, 전기차, 자율주행차,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산업을 휘젓고 다니면서 기술을 사고 베끼고 재창조하면서 이들 기술의 종주국인 미국을 추격이 아니라 추월을 꿈꾸고 있다.

   소유가 기반인 자본주의보다 공유가 기반이 된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공유경제의 확산에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중국은 한국 경제의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인구, 자원 부국인 중국을 이기는 법을 연구하기보다 중국을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때다.

     


기후와 경제

   국제 경제의 변동에 기후가 미칠 영향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다.

   <인류는 어떻게 기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는 산업혁명과 함께 사용량이 폭증한 화석연료인 석탄과 석유가 환경오염의 주범이고, 지구 온난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한다. 독특한 점은 장구한 시간 동안 누적된 농경과 전염병의 영향은 18세기 이후 화석연료가 기후에 미친 영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기후변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는 지구의 역사는 곧 생명체의 역사라고 본다. 지구생명체는 태양에너지와 기후변화의 합작품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업의 경영전략으로 저감 전략을 제안한다. 하나는 기존의 에너지 사용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연비를 높이거나 효율성 증대를 꾀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신재생에너지 시장의 확대가 필요하다. 이는 세계 경제 체제에서 우리의 기업이 속히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다. 이에 2015년 우리나라는 탄소 배출권 거래소 시장을 개장했다. 기후변화와 국제 경제를 연계할 때, “네가 현재 불행한 것은 과거에 네가 잘못 보낸 시간이 너한테 보복하는 것이다.”라는 외국 속담은 기후변화를 바르게 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