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과 최적의 사이에서
브런치북 편집과정에서 삭제해여 다시 올립니다.
"일 년 계획은 곡식을 심고, 십 년 계획은 나무를 심고, 일생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문장이 <관자>에 실려 있다. 일생 계획은 초년에 세우고 일 년 계획은 봄에 세우고 하루 계획은 새벽에 세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의 절차와 진행을 준비한다는 뜻이고, 마음가짐을 다잡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설날은 오고, 학생에게는 새 학기가 있다. 봄은 시작하기 좋을 때이나, 마음을 다잡는다면 언제든지 좋을 때다.
누군가는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도 실패다’라며 과감하게 도전하고 실천한다. 고난을 신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담글질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열정적인 발레리나 강수진과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의 삶은 완벽한 삶을 살아온 결과다. 완벽한 삶을 살려고 했던 더 사람들 이야기는 정진홍의 <완벽에의 충동>에서 만날 수 있다. 저자는 50번 이상 퇴고하지 않으면 책을 내지 않는다는 언론인이다.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뛰어들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쟁에 몰두하다 번아웃을 경험하거나 자살에 이르는 경우는 안타깝다.
요즘 한국 사회 분위기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겠다.’거나 ‘휘게(Hygge)’ 같은 여유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탈 벤-샤하르가 지은 <완벽의 추구>는 완벽한 삶보다 최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최적 주의자는 실패와 고통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이고, 성공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완벽주의자가 추구하는 삶은 시지프의 신화처럼 끝이 없다. 최적 주의자의 삶은 의미 있는 모험을 하는 오디세우스의 서사시를 닮았다. 2023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세이노의 가르침>은 완벽에의 충동에 가까운 삶을 ’피보다 진하게‘ 살라 한다. 살아가는 방식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완벽과 최적을 양극단에 두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가 최적만을 추구하면 성실하다는 평가받기 어렵고, 노년층이 젊은이에게 완벽만을 요구하면 꼰대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삶의 목표와 처한 상황에 따라 완벽을 추구할 때와 최적을 추구할 때는 달라야 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장편 소설 <브리다>에서 삶에서 취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견준다. 하나는 건물을 세우는 일과 같은 삶이다. 건물이 완성되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과 같은 삶의 태도는 늘 고생하고 쉴 틈이 없지만,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도록 해 준다.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자는 거다. 우리는 살다 보면 역경을 만난다. 자신의 삶이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고 느낀다면 최재석의 <역경의 행운>을 읽다 보면 내 어려움의 크기는 사소한 것이라 느낀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역경의 크기와 견주어 보고 어렵지 않게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다. 나무 의사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서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지만,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구본형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해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으라 한다. 정재승은 <열두 발자국>에서 회의적인 태도로 사는 과학자의 삶을 보여 준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프랭클린 자서전>은 자녀가 학생이거나 젊을 때 사 주고 읽고 실천하게 할 가치가 있다. 세계의 청소년들이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서 배우려 읽는 책이다.
시간은 하늘이 사람에게 준 것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 그 시간 중에서 오직 우리 것이고,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다. 누구나 오늘 ‘내면의 충실함’을 독서로 채워 나가기를 바란다. 홀로도 좋고 가족과 함께라면 더 좋을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대화하는 저녁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