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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11. 2023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9,000자입니다.


   살아가며 분노, 스트레스, 우울증, 강박과 같은 심리상태를 경험한다. 심하면 번 아웃, 자살로 바르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평소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일이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단단하게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양과 서양에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독서의 결과를 정리해 보니 다가가는 방법은 다르다. 그래도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   

  

잃어버린 마음

   <맹자>에 실린 다음 문장이 살아가면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데 있다. (학문지도무타구기방심이이의 學問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矣)” 이렇게만 행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스스로 바꾸고 싶다면 마음부터 지켜야 한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공부하며 축적해갔던 사유의 시간만큼은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다. 진정한 어른이란 살아온 경험과 겪어온 세월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을 보지 못하면 눈을 감고 걷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평생토록 근심 없이 지내다가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어버리고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삶이란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을 일컬어 삶이라고 한다면, 그 삶이란 짐승과 다르지 않다.”라는 정약용의 생각은 읽고 쓰는 사람을 위안한다. 성찰 없는 지식의 축적은 무의미하다. 어른이란 많이 아는 이가 아니라, 배운 것을 깊이 고민함으로써 작은 욕망과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욕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 인심(人心)은 감정과 욕망으로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가진다. 도심(道心)은 맹자가 말한 선한 천성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이 사단이 있어야 사람이다. 수많은 문장이 나를 깨우고 실천하라 한다.

   마음이 물질의 부림을 당하면 짐승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우선 몸가짐부터 정돈해야 한다. 사람은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쉽게 이루어진 것 같은 평범함 안에는 무수한 어려움을 거치며 형성된 비범함이 숨어 있다. 짐은 무겁고 길은 머니 부지런히, 그러나 쉬며 가야 한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에서부터다.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을 담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라 한다. 행동에 품위가 있어야 하듯이 생각에는 상식이 있어야 한다. 침묵은 자신 없는 인간이 택하는 가장 안전한 방책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억력의 부족에 투덜대지만, 판단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 인간과 일은 각기 고유한 관점을 갖는다. 올바른 판단을 위하여 가까이에서 보아야 할 것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야만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는 힘든 고통이다. 무능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면 무작정 비난해 댄다. 재주를 지닌 어리석은 사람은 있어도 판단력을 지닌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라로슈푸코는 판단력과 사랑을 가질 때 사람이라 말한다.


인간관계와 역경

   내 삶에 순경(順境)만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역경(逆境)에 처하면 삶을 포기하거나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일어설 힘이 필요하다. 사서삼경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도 내 삶에 맞게 해석하지 못하면, 그저 경서와 고전을 읽었다는 것 외에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읽는 사람이 수준이 책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남과의 비교와 욕심에서 비롯된다. 어차피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이미 온전한 나의 삶이 아니다. 여유는 내 마음속에 있으며 만족으로부터 나온다.

   화복(禍福)에는 문이 없다. 다만 자기 자신이 불러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공 여부는 그 사람이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산중의 적은 물리치기 쉽지만, 심중의 적은 물리치기 어렵다. 연륜을 생각하니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늦었다고 탄식할 필요는 없다. 정작 탄식해야 할 것은 늙어서도 헛되이 살아가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정작 슬퍼해야 할 것은 죽은 뒤에 그냥 잊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경을 대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소나기는 온종일 계속되는 법이 없다. 조건이 같아도 주어진 조건을 보는 관점과 풀어나가는 방법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특정한 상황에서는 장점이 단점으로 변하고, 반면 단점이 스스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장단점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실패로 직결되지 않는다. 내리막길로 향하는 징후는 최고일 때 나타나고, 새로운 것의 태동은 쇠퇴의 극에서 생겨난다.

   역경은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고 한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사람은 결국 자신 역시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되어 고독하게 홀로 남겨지게 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고, 황하는 아무리 작은 시냇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결국 혼자다

   인생을 꾸려나가는 일과 나락에 떨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일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한다. 나를 낳아 기른 부모가 먼저 죽음을 맞는 것이 평범한 일이다. 혼자임을 자각할 때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고독한 시간에 책을 읽고 저자에게 몰입할 수 있다. 고독을 극복하면서 단독자(單獨者)임을 자각할 수 있고, 오로지 혼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단독자란 자유와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함께 있다고 다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친구와 떨어져 각자 자신과 마주하면 함께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낀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태도는 독이 될 수 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세상에서 바라보는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어렵게 살다가 재산을 모은 사람은 사업이 망해도 다시 일어서듯 고독한 시기에 자신을 단련한 경험은 자산이 될 수 있다. 자신이 혼자임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어떠한 시련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 40대 후반에 직장을 그만두게 될 때를 대비해 사무실 모니터에 붙여둔 글은 독서로 10년 후를 대비한다. 평이 나를 죽이고 살린다. 쉽고 정확하게 일한다.” 였다. 독서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고,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흑백 논리로 보는 자세를 버렸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했다. 혼자 있는 것의 힘을성장을 위한 조건으로 여겼다.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간다.     


우리는 시간을 쌓아간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과 신에 대해 논하며 인간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 신을 믿으라 한다. 크리스트교도가 되라고 하니 크리스트교 호교론이라 평가한다. 종교라는 관점을 벗어 놓으면 시간과 사유에 관한 생각은 도움을 준다. “시간은 고통과 분쟁을 진정시킨다. 사유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해 행복과 불행을 다 경험했을 러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술에 취하는 것은 일시적인 자살이라니 애주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러셀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성공을 위한 투쟁이라 본다.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요소들을 모두 희생한다면, 그 성공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건전하고 조용한 기쁨을 삶의 조화로운 이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라 한다. 대부분의 걱정은 그 문제가 대단치 않은 것임을 깨달으면 줄일 수 있다. 내가 최악의 사태를 직시할 때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면, 걱정은 더는 걱정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인생을 생각하지 남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역지사지란 글처럼 쉽지 않다. 진실이 아무리 불쾌해도 단호하게 진실에 직면하고 진실에 익숙해져 그 진실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야 바람직하다.      


삶을 대하는 태도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헨리 조지는 평생 독서에 힘썼고 독학으로 공부해 <진보와 빈곤>을 남기고 지대조세제를 제안해 세계 사상계의 거목이 됐다. 혁신을 강조한 경제학자 슘페터도 헨리 조지의 사상과 업적을 높게 평가한다. 헨리 조지의 묘비에는 자기 자신을 두고 서약한 글이 새겨 있다. 강한 삶이 쉽지 않은 만큼 영향력은 크고도 오래간다.


“내가 분명히 하고자 노력해 온 그 진리는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오래전에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결코 숨겨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동지들이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고를 할 사람들, 고난을 받을 사람들,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할 사람들,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아라비안나이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간의 근심, 전화위복을 대하는 태도란 이래야 한다고 말한다.


“슬퍼하는 이에게 일러 주게나.

슬픔은 언젠가 봄눈이 녹듯 하고

즐거움에도 끝이 있게 마련이듯

근심도 연기처럼 사라지리니”      


인생의 전화위복을 노래한 시로 위안한다.


“세상만사에는 미리 정해진 때가 있는 법이니, 고난과 번뇌에 빠졌다고 해서 불평하지 마라. 화와 복은 뒤엉켜 늘 함께 있는 것이니, 비탄에 잠길망정 기쁨의 전율도 함께 하리라. 박복한 사람도 언젠가는 축복으로 빛나리니”     


나만의 서사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한다. 선택이 쌓여 인생을 만든다. 선택이란 결정의 다른 이름이다.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를 줄여야 한다. 선택안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찾거나, 곧 사라질 감정에 휘둘리거나, 자신의 예측을 과신하는 자세는 결정을 바르게 할 수 없다.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경제의 문제에 관한 거대담론에 일방적으로 설득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의 눈으로 본 사람의 마음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이를 ‘서사의 위기’라고 본다. 그러는 사이 오직 나만이 책임져야 할, 내 구체적인 실존의 문제는 외면하도록 철저히 학습되었다. SNS에는 공허한 남의 이야기뿐이다. 삶의 재미는 내 이야기가 있을 때 생긴다. 후회가 없으려면 재미있어야 하고 스킨십을 자주 하라며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 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난다”라는 앤서니 기든스의 말을 전한다. 문화심리학의 시각에서 사회주의가 망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재미없어서라고 해석한다. 사회주의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느껴지는 재미와 행복을 생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몰락했다고 평가한다. 세상일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선택에 재미를 더하라는 김정운의 조언은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닻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명분을 찾는다. 의리의 무거움만 알아 깊은 정을 배제하는 데서 독선이 싹튼다. 뼈대가 중요하지만, 살이 없으면 죽은 해골이다. 살을 다 발라 뼈만 남겨놓고, 이것만 중요하다고 하면 인간의 체취가 사라진다. 명분만 붙들고 사람 사이의 살가운 마음이 없어지면, 세상일에 자기주장만 앞세워 살벌해진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여러 갈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감정을 갖는다. 분노의 폭발 순간은 논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두엽의 기능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상태라 만취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설득이나 타협할 수 없다.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기본이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와 키케로의 조언, 잠언이 주는 가르침은 같다. “세상이 그를 무시할 때 인내심을 가질 수 있고, 세상이 그를 칭송할 때 평정을 유지하며 타락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위대한 진리와 영원한 법칙 아래 살아야 한다.”라는 에픽테토스, “자제력을 가지고 일관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내적인 만족감을 찾고, 곤경에 처해도 무너지지 않고, 어떤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갈급한 욕구에 흔들리지 않고, 격렬하고 헛된 흥분에 사로잡혀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가 찾는 현자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키케로의 조언은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는 잠언도 자신에게 중심을 세우라 한다.     

   

   16세기 프랑스인 몽테뉴 작품인 에세(Essais)를 그의 삶의 여정에 따라 21세기 작가 사라 베이크웰이 풀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놓았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몇 가지를 쉽게 보도록 적어본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결점을 지낸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다. 내가 고양이를 보는 것처럼 고양이도 나를 본다. 내 마음이 확고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면, 나는 에세이를 쓰지 않을 것이고 확고한 결론을 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늘 수련 과정에 있고 시험 대상이다. 우리와 우리의 판단,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것들은 모두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굴러다닌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물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판단하는 존재나 판단되는 존재가 모두 지속해서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이 염려하는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영혼의 성숙에 가장 큰 장애물이며,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게으름이다. 시간을 내서 해 볼 용의만 있으면 무슨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직면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남아, 오랫동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가 되고 만다. 스캇 펙의 조언은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 일부가 되니 문제 상황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물질 만능 시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김훈의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글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제각기 의견을 낸다. 특정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긍정하는 이도 있다. <인간의 품격>은 선택해 보라 한다. “그 누구도 나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또한 그 누구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vs “내가 이루어낸 것을 보면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이 두 문장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서로 다른 길로 안내하는 문이다.


얀테의 법칙

   북유럽에서 전해오는 덕목으로, 보통사람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얀테의 법칙’은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하거나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한다. 10개의 법칙으로 구성된 얀테의 법칙은 내 새끼 지상주의가 얼마나 저급한 해악인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1.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2. 당신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자만하지 말아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6. 당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7.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아라.

9.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10.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책의 읽으며 동양과 서양을 구분해 타인의 삶에서 배우니 비트겐슈타인의 말과 논어가 가르치는 문장을 기본으로 삼을 만하다. “당신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는 문장이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서면 분노, 판단력, 사랑, 역경, 인간관계, 선택과 결정, 게으름은 극복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나누고, 조화롭고,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더불어 경쟁하며 살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얀테의 법칙은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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