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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10. 2023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2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분량이 많아 누가 읽겠느냐는 충고가 있어서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1과 2]로 재편집하여 공유합니다.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1]로부터 이어집니다.



철학에서 골라낸 유용한 사유방식 

   부만 있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철학 없이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한계가 없는 부를 추구하는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어른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여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올바른 배움이란 뛰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배울 점을 배우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서 피타고라스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한다. 피타고라스 정리로만 기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철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처음으로 코스모스(COSMOS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질서)에 대해 말했다. 피타고라스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데,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으로 사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공동체는 재산 공유의 원칙, 묵언 규칙, 보안규칙이란 배타성을 가져 압박을 받았다. 스토바이오스는 128개의 아포리즘을 담은 저작집을 남긴다. 


고귀한 말이 비천한 행위를 가려주지 않고, 훌륭한 행위가 비방하는 말로 인해 해를 입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절제가 아이들에게 가장 큰 가르침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괴로워하지 않고, 있는 것들로 즐거워하는 사람이 현명하다. 정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불의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제쳐두는 것이다. 가난과 부유함은 부족과 넘침의 다른 이름이다. 부족함이 있는 사람은 부유하지 않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늙은이는 한때 젊었다. 그러나 젊은이가 노년에 이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성취된 좋은 것은 장차 있게 될 불확실한 (좋은) 것보다 더 좋다.


    많은 희랍 철학자들의 아포리즘은 동양의 격언과 같은 것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람이 사는 것은 비슷한가 보다.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는 스토아 철학의 아타락시아(평정심)를 생각한다.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1~2세기에 로마에서 노예 여성의 아들로 태어나 운명적 불행을 즐기며 살았던 철학자다. 21세기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서술이지만, 최대한 양보하여 노예의 아들이면서도 철학을 실천한 학자로 살아간 사람이란 의미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답은 스토아 철학에 있다고 믿는다. <엥케이리디온>은 크리스트교적 금욕주의와 도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도덕 규칙과 철학 원리를 담고 있는 선집(選集)이다. 스토아 철학 일부로 다음의 글을 기억하라고 한다. “모든 욕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면해야 한다. 나의 욕구의 대상이 충족되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만일 그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기원전 300년경에 시작되고 로마 철학자들이 실천한 스토아 철학을 현재 생활에서 실천하고 그 경험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삶에서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전한다. 종종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라며 ‘부정적 상황 설정법’을 통해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 목표의 내면화를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고, 과거 때문에 후회, 분노하지 말고 미래로 미루지 말며, 현재부터 평정심을 찾도록 노력하라 한다. 자발적 불편함을 경험해보라고 권유하며, 행복은 서두르지 않고 매일 매일 실천함으로써 스토아 철학이 나의 평정심을 유지해 줄 것이라 안내한다. 데카르트가 제시한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천원칙도 스토아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나 부를 정복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기본의 질서보다는 나의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자기 생각 이외에는 그 무엇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믿으며, 그럼으로써 외적 문제를 해결하려 최선을 다한 후에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그것을 믿어라.” 화와 짜증, 분노가 잦고 주기적으로 다가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에 수긍하며, 노년을 어떻게 맞이하고 준비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공감한다. 나이 들어도 철이 덜 들었다고 느낀다면 스토아 철학을 만나보아야 한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명상록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원인이 있으며, 죽음은 탄생과 같이 긴 시간 일부이기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 황제였던 그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받은 도움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함을 표현하였고 이성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모든 것은 변하니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하라 다짐하고 실천하였다. 부러워할 것 없는 로마 제국의 일인자가 양심적이며 실천적인 황제로 거듭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 자기 다스림을 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에 현재까지도 울림이 이어진다.     


   독서로 철학을 만나 배우며 평상시에는 스토아 철학에 기대에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어려움에 닥쳤을 때는 실존주의 철학에 의존해 일어서려 애쓰며 살아간다. 

   철학의 출발점은 ‘나’다. 자연과 신이 철학의 출발점이었던 고대, 중세를 지나 19세기에 헤겔과 마르크스가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니체는 생의 철학, 샤르트르는 실존철학이라 부르는 나(인간)에서 출발한 거로 본다. 자연, 신, 역사를 거쳐 ‘나(인간)가 현재 철학의 출발이라는 거다. 서양철학이 그랬듯이 동학의 인내천이나, 중국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인(仁)도 결국은 ’나(인간)‘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실존주의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샤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이해를 도울 몇 가지 개념부터 정리하면, ‘기투(project)’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 실존은 결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되거나 결정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는 인간 실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지며, 불안을 느낀다. 자유가 불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안’이란 인간이 자기가 자유롭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감정이다. 불안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함 없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나,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나를 의식할 때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감정이다. 불안은 인간 실존의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대상 자체가 없는 감정이다. ‘홀로 남겨짐’이란 세계 속에 피투되어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조건이다. ‘절망’이란 인간은 홀로 남겨졌고, 인간에게는 그가 의지하고 기댈 그 어떤 본질이나 가치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다. 절망이란 인간 실존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구조적인 상태다. 인간은 오로지 인간 자신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에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 그러한 삶이 자기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위대한 의식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자신에게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즉 정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더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지 않고, 마치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매 순간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진정한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을 철학에서는 ‘실존한다’라고 부르고, ‘실존한다’라는 것은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로서 산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겹고 힘든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그저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하면 전혀 달라진다. 지겹고 힘들어서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죽음 앞에 미리 달려가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이 하찮은 일로 변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하찮게 생각했던 일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카뮈는 인간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으로 이런 고통을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통을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한다. 그래서 시지프나 우리는 단 두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는데 ‘희망을 갖고 사는 것’과 ‘자살하는 것’이다. 자살은 죽음과 함께 모든 문제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문제를 없애 버리는 것일 뿐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해결 방법은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는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다. 사막에서 버티기란 부질없는 희망을 품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자, 오지 않는 구원에 호소함 없이 사는 것이라 했으며 자살로써 회피하거나 기권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17세기 스페인 철학자이자 가톨릭교회의 신학 교수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조언> 은 부족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아포리즘이 있다. 실천이란 당위성은 미뤄두더라도 냉정한 태도로 나를 점검해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역사적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라시안의 조언은 실존주의와 중첩하는 부분이 있다. 


처세술은 도서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험이 삶의 길을 밝힌다.

지혜 없는 용기는 무모하고 용기없는 지혜는 무기력하다.

계획이 어중간하면 결과도 어중간할 수밖에 없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오늘을 망친다.

꽃길도 가시밭길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겉모습에 속지 마라. 와인병의 상표를 바꿔 붙이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적게 노력하고 많이 얻는 방법은 그저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고생과 노력의 티를 과하게 내는 사람은 존경받기 어렵다.

결점을 지적하고 약점을 들쑤셔봤자 내게 땡전 한 푼 돌아오지 않는다.

말은 짧게 할수록 좋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이라도 계속 갈고닦아야 장점이 된다.

실수했다면 반성하라. 머지않아 감당할 수 없게 될 테니.

현실 도피를 위해 운명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마라.

기회의 여신은 인내한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배움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바보로 살게 되고, 겉모습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인간은 ‘무한한 진보와 위대한 약속’(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 등)을 이미 이룬 것처럼 보이나, 개인적 이기주의의 추구, 인간의 탐욕, 자연과 적대적 관계 등이 우리를 곧 좌절하게 할 것이라 본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풀고,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와 인간의 가치와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당장 치러야 할 희생이 두려워 다가올 재난을 알면서도 막으려 노력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철학으로써의 불교

   ‘나의 본성은 내 이웃이 결정한다’는 문장에서 막혔던 가슴이 터지고, 답답함이 사라지며 ‘아! 그래,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연기적 사유’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책이란 독자가 읽었을 때 책이다. 가지고만 있으면 책이 아니라 짐이거나 스트레스일 뿐이다. 좋아했던 남자의 변심을 원망하고 안타까워하고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연기’를 받아들이지 못함이다. 연기(緣起)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이다. 

   연기적 사유’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별한다. 주역의 모든 것은 변한다와 같은 변화를 긍정함을 토대로 한다. 그러니 불변한 것을 찾으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다.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실체 같은 건 없다. 하나의 같은 사물이나 사실조차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혼 초기에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10년, 20년 후에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연기적 사유는 같은 것조차 조건에 따라 본성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업’이란 하던 것을 계속하게 하는 성향으로 관성적인 잠재력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업은 본성이 아닌 것조차 반복되면서 본성처럼 몸과 입, 의지에 달라붙어 관성적인 언행을 만들어낸다. 연기적 조건의 차이에 업의 힘이 끼어들어 변화를 만들어간다.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상이란 조건이 달라져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상이란 동일성이 없음, 동일성에 반하는 ‘차이’가 있음이다. “무상을 본다는 것은 같아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봄이다.” 무상을 보지 못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 할 때 애착과 집착이 일어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다. 차이에서 출발하는 불교 철학은 차이화에서 생긴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힘에 대항하며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를 풀어낸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이라 본다. 행동 패턴은 익숙해진 일상생활을 쉽고 편하게 해 주는데, 이는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패턴 안에 제약된다.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오십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자아에 갇혀가는 시기라는 말이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와 남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다. 남에게 폐가 되고, 나에게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란다. 그렇기도 하다. 

   ‘도’라는 지혜는 선악호오((善惡好汚), 미추정사(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요체다. 분별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분별하지 말라는 뜻은 호오미추의 판단을 떠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는 거다.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집착이다. 연민 없이 사랑하라는 말은 동정이나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내가 가진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 조건 속에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다.”라는 가르침이다. 

불교를 종교보다 철학으로 이해하고 안내하는 불교 철학 기본서 격인 <불교를 철학하다>를 읽고 배운다.     


철학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외부의 시각에서 21세기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내부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조선 시대를 이끌어간 유학, 유교 사상이 가진 시대적 제한을 유교의 결정적 오류로 몰아붙이고,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것으로 비난하는 것은 무분별한 발상이다. 유교가 가진 시대적 한계가 무엇이고, 유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초시대적인 보편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사상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무리한 비판이다. 이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으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인류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철학 과목은 선택과목이다. 극히 일부 학교에서만 철학을 배운다. 철학 하기를 배울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이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대승불교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학교 교육은 소홀하게 취급했다. 물론 니체의 철학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었음을 밝히는 역사책은 지금도 없다. ‘그리스의 철학과 헬레니즘의 과학은 이슬람 세계에 의해 계승, 발전된 뒤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라는 기술은 서구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난 객관적 기술이다. 313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가 공인 된 의미를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함까지가 배운 바인데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억압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라고 평가할 힘은 철학하는 힘이다.

   신과 교회의 권위, 절대왕권의 억압이라는 답답한 사회 현실에 분노한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볼테르는 공자와 유교의 도덕 정치를 이상적 정치 철학으로 여겼고, 중국은 유럽의 철학과 제도가 지닌 문제를 정확히 짚어 낸 거울이자, 도덕적, 정치적 개혁의 모델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철학하며 우려하기는 종교적 확신과 철학적 확신이 확증편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능력 범위를 파악하고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범위가 얼마나 큰지보다 범위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황이 분명치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다.      


   어떻게 철학 하기를 시작할까. 철학 서적에서 만난 철학자 중 많은 이들이 걷기를 일상적인 일로 여겼다. 소로는 하루에 적어도 네 시간 이상 걸었다고 한다. 월든 호숫가에 살 때 소로가 걸은 것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낯선 것에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걷기는 관찰과 반추의 원천이자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니체도 한평생을 걸었다. 오직 시각을 다양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칸트,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도 걷기를 즐긴 철학자다. 걷기로 철학 하기를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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