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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10. 2023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1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9,000)     


   정권이 바뀌면 국정철학도 바뀐다. 성공한 기업은 나름의 기업 철학을 갖고 있다. 학교는 학교장의 교육 철학을 반영하여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철학을 논하면 지적이고 있어 보이며, 현학적인 말을 듣는 사람은 기가 죽고, 말하는 사람은 기세를 올리기도 한다. 30여 년 전만 해도 학교장의 경영 의지를 학교 교육목표에 넣어야 했다. ‘알아서 해봐!’라는 말에 아무개 교장은 교육 철학도 없는 관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월은 흐르고 의식이 변했다. 이제는 학교장이 자신의 교육 철학을 조직에 요구하는 것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철학이란 존재, 인식, 가치에 관해 생각의 바탕에서부터 실천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유하는 모든 행위다. 지극히 평범한 철학적 원리는 의식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같은 경험이라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사유와 행위가 달라진다.

   철학사의 흐름을 더듬어보면 현재의 주류 철학은 과거의 철학에 대한 반성에서 재출발한 것이고, 앞으로의 철학은 변화하는 현재를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까지 담아낼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로는 신의 영역 안에 있던 인간이 신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을 찾아가는 역사였음을 본다. 이러한 과정을 자기 생각에 따라 경험을 덧붙여 말하고 글로 써내는 것이 문학이고. 인문학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의 틀인 철학을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해 어떤 세계관, 인생관, 윤리관을 지고 살아갈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이것이 독서가가 인문학을 하는 까닭이지 싶다.

   동양과 서양,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는 방법과 대상이 같지 않다. 이를 살펴보는 것이 철학사를 개관하는 일이다. 수많은 철학자는 자신의 사유를 실천했고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서 철학사의 줄기를 나누거나 바꾼 이들의 사유와 실천을 살펴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나에게, 우리의 삶에 얼마나 유용하냐는 준거에 따라 취사선택해 보는 일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철학사 개관

   철학사를 이해하면 서양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다. 서양 사상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2단계는 1단계를, 3단계는 2단계 사상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보면 된다.


   1단계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중심이 돼 서양철학이 시작된 단계다.

   이원론적 대립(선과 악, 아후라마즈다와 아후리만 등)과 만물의 변화(주역,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한다) 등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동양에도 익숙한 사상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 고대 철학은 플라톤이 지배한다. 현실이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며 ‘동굴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데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본질이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존재를 이성으로 믿으라는 거다. 경험과 감각은 완전하지 않다는 거다. 현실은 진짜가 아니고 이데아가 진짜며 이데아 계에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지성과 이성을 갖춘 인간뿐이다. 이데아론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위대하다는 생각을 서양인에게 심어 준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계는 본질의 세계다. 본질의 세계는 신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데아론은 크리스트교와 결합해 서양 세계를 지배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천체, 동물,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시학 등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의 사상이 진리로 인식될 정도로 후대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의 모든 것을 원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욕망이 서양 사상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고대 그리스인의 비판적 사유방식을 가로막아 버렸다. 이데아론이나 크리스트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조건 없이 믿고 중요시한다. 플라톤의 철학과 크리스트교가 치밀하게 결합하였다. 이데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존재를 입증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현실과 우주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사라졌고 서양의 사상은 정체 혹은 퇴보한다.     


   2단계는 크리스트교로부터 탈출해 근대 합리주의와 철학을 완성하는 단계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은 생각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뿐임을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자신이 의식함을 자각하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로 보게 된다. 인간이 이성을 발휘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칸트는 경험적 인식에 앞서는 선천적 인식으로 ‘아 프리오리(a priori)’를 상정한다.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말한다. 인식이 한정적이라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니 단념하라 말한다. 선천적이건 경험적이건 우리의 인식은 대상 자체(물자체)에조차 이를 수 없으므로 이데아계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식이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의 방법에 의존한다는 것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에게 없는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도 뛰어넘는 인식을 초월한 능력인 이성을 가진 인간은 대단하다는 주장이다.

   신의 세계는 모른다라며 경험론과 합리론에서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해 독일 관념론을 만들기도 한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보고 정반합을 반복하며 모순을 해결해 인류 역사가 발전한다고 본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은 본질을 연구한 결과로 인간 이성이야말로 최고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3단계는 이성으로 완성되었다고 믿은 서양 중심주의에서 탈출하는 단계다.

   니체는 노예의 평화를 거부하고, 정신의 자유, 용기를 갖고 망설이는 나 자신을 극복하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 초인이 되라 한다. 낙타(의무 수행과 무거운 짐을 짐에 견디는 정신), 사자(자유 의지로 의무조차 거부하는 정신), 어린아이(천진무구한 놀이 정신이 창조한다)라는 정신 변화를 상정한다. 니체의 사유방식은 자신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강한 힘을 주기에 실존주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실존주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라는 것이다. 니체는 어떻게 살 것이냐는 명제에 자연과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강하게 살아가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언젠가 죽으니 이를 각오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한다. 물건의 존재와 시간적 존재인 인간 존재와 다르다고 보고, 시간이라는 요소를 철학에 도입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치열하게 사는 삶이 니체와 하이데거가 지향하는 삶이다. 실존주의 철학에 관해서 뒤에서 상술하려 한다. 독서로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와 닿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기존의 이성주의에 대한 위기감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판단을 보류(에포케 epoche, 판단중지)하라고 한다. 사물을 편견으로 판단하지 말고 현상 자체를 관찰해 기술하고 판단은 그 후에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 기술이며 세밀히 관찰하고 기술하면 대상에 애정이 생긴다. 구조주의는 체계가 요소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언어 문법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노엄 촘스키의 인식, 서양인에 의해 만들어진 동양 이미지인 오리엔탈리즘, 중심부의 번영은 주변의 기능에 의존한다는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등이 구주조의 범주 내에 있다.     


   철학사를 개관하며 스치는 단편적 생각들을 모아본다. 칸트의 ‘신의 세계는 모른다’는 공자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 근대 합리주의 철학에 깔린 계몽사상은 중국의 학문이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 전해진 이후 왕성해졌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는 에포케가 자주 사용된다.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은 <본성과 양육>의 논쟁에서 본성에 가깝다. 매판자본론의 뿌리에 세계체제론이 닿아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사대주의와 대척점에 있으며, 중화사상과 논리 구조가 비슷하다. 사이토 다카시의 칭찬에 대한 생각 - “부모에게 제대로 혼난 경험이 없이 칭찬만 받은 아이는 사회에 나갔을 때 갑자기 칭찬받지 못하면 맥없이 부러진다.”- 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유행에 대한 반격이며, 21세기 한국 학교 교육에서 귀담아들어야 할 생각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추론이자 영향력에 있어서 사상이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가 다름을 느끼게 한다. 현상학에서의 주관은 우리가 사용하는 객관적이란 단어에 문제가 있음을 이론적으로 말해준다고 봐 공감한다. 대화와 토론에서 흔히 ‘객관적으로’라고 말할 때 객관적이란, 사실 주관적인 것이다. 현상학적 기술인 자세히 보고 기술하라에서 나태주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詩가 떠오른다. 고난을 겪어야 자신을 긍정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것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자,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낸 오디세이를 떠올린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니체의 ‘낙타’는 죽었고 권리만 앞세운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생각은 그리스나 중국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중위도 지역이기에 발생한 사상이리라. 기후변화가 미약한 열대기후 지역에서 발생할 수 없는 思考다. 철학사 개관의 기준으로 여길 수 있는 <철학 읽는 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발전시킨 아랍 세계의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개되지 않기를 바라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철학자와 사상가들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부터 이후 시대까지 발자국을 남겼다. 의미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모두를 언급하기에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만나는 철학의 개론서는 서양철학사를 볼 때, 시대별로 철학자를 나열하고 핵심 사상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혹은 철학 고전을 중심으로 철학자의 사유의 방식과 행동을 소개한다. 이와 달리 알랭 드 보통의 <위대한 사상가>는 철학, 정치이론, 동양철학, 사회학, 정신의학, 미학과 건축, 문학으로 구분한다. 사상가라며 철학자만 떠올리는 정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화가, 건축가, 정신분석학자도 사상가에 포함하는 알랭 드 보통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원제가 <무기가 되는 철학>이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로 번역한 야마구치 슈는 사람, 조직, 사회, 사고의 관점에서 유목화하여 철학자의 핵심 철학을 안내한다. 동양철학, 인도 철학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야마구치 슈의 유목화는 읽고 받아들이기 수월하다. “교양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라며 우리는 왜 철학을 배워야만 하는가를 묻고 답한다.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비판적 사고의 핵심을 배우고, 어젠다를 정하며,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기에 철학자의 중요한 사상을 대강 추려본다.


   사람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의 핵심은 타인을 설득해 행동을 바꾸려거든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득보다 이해, 이해보다 공감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르상티망(ressentiment)으로 타인의 시기심을 관찰하면 비즈니스의 기회가 보인다고 말한다. 인식 능력과 판단 능력이 르상티망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을 지적한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히면,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예속, 복종(예: 명품 구매)하거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꾼다. 내가 무엇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내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르상티망에 의한 것인가 구별하라는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페르소나(persona)는 직장생활하면서 페르소나를 잘 관리하라 한다. 포커판에서 포커페이스처럼……. 그래야 자신의 모습을 보호할 수 있다.

   에드워드 데시는 성과급으로 혁신을 유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가를 예고하면 이미 재미를 느껴 몰입해 있는 활동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저하된다. 당근과 채찍은 효과가 없고 도전이 허용되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존 로크의 ‘타블라 라사’는 타고난 능력이란 없다. 경험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을 읽어보면 본성과 양육 사이에서 균형 잡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란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고 본다. 그래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자유를 내던지고 고독을 이기기 어렵고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전체주의를 택한다. 프롬은 하층 및 중산층에서 나치즘을 반기며 맞이한 이들이 자유의 무게에서 벗어나 의존과 종속을 추구한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본다. 자유로워지는 것은 개인의 자아와 교양의 강도에 달려 있다.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설명한다.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주체적으로 관계된 일에 참여하라. 자신의 행동과 세계에 참여하라고 강조한다. 이는 행정학의 조직론과 리더십 이론에서 강조하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누구나 이이히만처럼 될 수 있다.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일수록 인맥이 넓지 않다고 본다. ‘던바의 수’와 연결지어 인간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근거다. 리언 페스팅어의 인지부조화란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꺼이 생각을 바꾼다. 인간은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라 합리화를 도모하는 생물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할 때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고 본다. 실제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무기력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행복한 몰입의 영역에 도달하려면 걱정이나 불안의 영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한다.    

 

   조직에 대한 사유로 “어떠한 수단과 비도덕적 행위라도 결과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증진한다면 그것은 허용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자질과 행동 방향에 관한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악마의 대변인’ 역할이 조직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다수파를 향해 의도적으로 비판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역할을 맡기라는 것이다. 지적 수준이 높을지라도 동질성이 높은 사람들이 모이면 의사 결정의 질이 현저히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쿠르트 레빈은 혁신이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IMF 위기 때 많이 읽힌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 같은 맥락이다. 막스 베버는 권위를 만들려면 역사적 정당성, 카리스마, 합법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란 개념으로 타자(소통이 안 되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는 깨달음의 계기로 해석한다. 他山之石과 동류다.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IQ 80의 차이를 만든다.

   로버트 킹 머튼의 마태 효과는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진다고 풀어준다. 한국식 나이 계산법에 따르면, 1월생이 12월생보다 성적도 좋고 스포츠도 잘한다. 꽉 찬 나이가 좋다는 것이다. 마태 효과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초기 실적의 차이를 그다지 의식하지 말고 조금 더 여유롭고 긴 안목으로 사람의 가능성과 성장을 내다보라는 것이다. 부조종사가 조종타를 잡았을 때보다 기장이 조종타를 잡았을 때 추락 사고가 많다. 조직에서 의사 결정의 질을 높이려면 구성원간의 의견 표명이 자유롭고 마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부하 직원이 “그건 말도 안 됩니다.”라고 반론할 수 있어야 한다.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야 기술혁신이 가속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반취약성(anti fragile)의 개념을 사용해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라 한다. 안정이 계속될수록 리스크는 쌓인다. 외부 혼란이나 압력에 오히려 성과가 상승한다. 스트레스가 적은 상황일수록 시스템은 취약해짐으로 언제나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일정하게 가해야 한다. 그 실패가 학습을 독려하고 조직의 창조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관한 사유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질문하며 답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전개되는 노동과 자본의 분리, 분업에 의한 노동의 시스템화가 인간을 소외시킨다며 ‘소외’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규칙을 깼을 때 벌칙이 가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박탈할 수 있는 거대한 권위체를 두고 그 권력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거대한 권력에 지배된 질서 있는 사회와 자유롭지만 무질서한 사회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를 묻는다.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집합적인 의사 결정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면, 그 집단 속에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의 판단보다 질 높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의 자연도태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돌연변이가 유전되고 자연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 자연도태란 개념은 세계나 사회의 성립과 변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 마르셀 보스의 증여를 의무(증여할 의무/받을 의무/답례 의무)로 보는 견해는 등가 교환을 원칙으로 하는 경제학 개념으로 풀 수 없다. 모스가 증여에 주목한 것은 유럽 사회가 증여라는 관습을 잃어버렸기에 경제 체제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제2의 성은 편견에 대한 무자각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최대의 장벽이라고 본다.

   세르주 모스코비치의 격차 개념은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는 말이다. 격차나 차별로 인한 질투의 감정은 사회 조직의 동질성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구성원에게 상처를 준다. 알렉시스 토크빌도 모든 것이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며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미셸 푸코는 파놉티콘에서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에서는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돈을 쓴다고 한다. 이를 차이적 소비로 이름 짓는다.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같은 맥락이다. 멜린 러너는 ‘공정한 세상 가설’로 보이지 않는 노력도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거짓말이라 판단한다. 공정한 세상 가설을 믿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무의식중에 ‘노력 원리주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따르지만,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싸워가는 것이 우리의 책무고 의무라고 본다.  

    

   어떻게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통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배움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이 생김을 강조한다. 안다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착각, 독선, 거짓, 무비판에 따른 편견이 오해를 일으키니 이를 제거하고 진리에 다다르고 본연의 모습을 보라고 한다. 게오르크 헤겔의 변증법에서 진보는 테제/안티테제/진테제라는 나선형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에드문트 후설의 에포케는 판단 중지다. 때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에포케는 타자 이해의 어려움을 깨닫고, 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힌다. 토머스 쿤은 세상은 갑자기 바뀌지 않으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가 멸종하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여 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질 때 비로소 승리한다. 이것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엘런 케이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 말한다.     

 

분량이 많아 누가 읽겠느냐는 충고가 있어서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1과 2]로 재편집하여 공유합니다.

[니체의 '낙타'는 죽었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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