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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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라면은 우리 생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음식이다. 그만큼 라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여러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사람마다 각자 가장 맛있게 먹은 라면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저마다 다른 추억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출출함이 느껴지는 밤에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들을 넣고 끓여 먹는 라면.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담근 후 오들오들 떨면서 친구들과 나눠먹는 국물이 자작한 라면. 이외에도 PC방에서 게임을 즐길 때나 술을 마신 다음날 해장을 위해 먹는 라면까지. 세상에는 추억이 가미되어 맛깔스럽게 요리되는 라면들이 많지만 나는 가장 맛있었던 라면을 떠올리면 딱 한 가지의 추억만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14시간의 행군 중에 먹었던 작은 컵라면이다.


땡볕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나와 동기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완전군장을 한 상태로 연병장에 집합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었음에도 태양은 내 뒤통수를 뜨겁게 내리쬤고, 뜨거운 공기는 모래바람과 함께 실려와 나의 코를 간지럽혔다.


무사히 다녀오라는 학교장님의 훈사가 끝난 후 시작되는 장거리 행군. 병영에 있는 모든 장교 후보생들이 행군에 참여를 해서인지, 선두가 학군교 정문을 빠져나갔음에도 내 차례가 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고, 대열의 끝과 끝은 긴 뱀을 보는 듯 거의 1km가량 떨어져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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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원 도로 위에서는 좌우 밀착하고, 앞사람과 간격을 맞추고 걷는다.




행군은 50분을 걷고 10분을 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처음 행군을 하고 3시간 정도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길가에 군장을 내리고 한숨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다독이며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여유로웠지만 행군의 진정한 고통은 해가 지고 난 이후부터 찾아왔다.


네온사인과 반짝이는 간판이 보이던 풍경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진 산등성이와 휑한 논밭만이 미궁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던 길. 가끔씩 길 주변으로는 오래된 민가가 드문드문 보였는데, 모두 불이 꺼져 있어서인지 스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행군을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나가자 어둠 속에서는 동기들의 앓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나 어느 순간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인지 불편한 감각이 발목과 종아리를 타고 온몸에 전달되었고, 40kg에 가까운 군장이 오랜 시간 몸을 짓눌러 어깨와 허리에서는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이 아픔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양쪽 어깨에 있는 근육을 칼로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6시간 가까이 계속해서 걷기만 하는 일이 반복되자 몸은 물에 젖은 빨래처럼 축 처지기 시작했다. 입고 있었던 전투복은 땀에 젖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고, 휴식을 할 때마다 체크했었던 발은 화상을 입은 듯 여기저기 물집이 잡히게 된 터라 이제는 관리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행군 도중 나름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행군하던 중에 누군가가 "어? 위에 뭐 떨어진다."라는 말을 해서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작은 별똥별 하나가 내가 걷던 곳 옆, 수확이 끝난 논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별한 소리 없이 푸른색을 띤 엄청나게 밝은 빛이 번쩍하며 주변을 대낮처럼 밝혔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는데, 누가 보았어도 '환상적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때의 풍경은 놀라웠다.


여하튼 행군이 6시간을 넘기며 힘듦이 극에 달할 때 즈음, 함께 걷던 교관님의 무전기에서 잡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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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까지 도착한 이후에 대휴식 실시하겠습니다.




대휴식. 이것은 길었던 행군을 잠시 멈추고 한 시간가량을 쉬는 긴 휴식을 뜻하는 용어로, 어찌 보면 우리들의 입장에서 행군을 절반까지 완료했다는 희망의 신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빨리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 (계속되는 아픔에 신물이 났다.) 괜히 투정 삼아 "그냥 계속 걷지 왜 쉬지?"라며 혼잣말을 했다.


대휴식을 하는 장소는 제대로 된 불빛이 없어 어디인지 모르지만 달빛에 윤슬이 아른거렸던 것으로 보아 강이나 호숫가 주변 둔치였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중대의 동기들은 지시에 따라 정해진 대열 없이 그냥 서로 둥글게 둘러앉아 군장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절뚝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었다.


행군의 가장 뒤에 있는 중대가 들어서자 임시로 만들어진 본부석에서는 각자 식사와 음료를 챙겨가라고 공지했다. 나와 동기들은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본부석 쪽을 기웃거렸는데 거기에는 작은 육개장 컵라면과 이온음료가 놓여 있었다.


이후 우리는 각자 줄을 서서 순서대로 라면을 받기 시작했다. 라면 물을 붓는 은 색깔의 긴 보온통에는 아마도 뜨거운 물이 가득 들어있었을 테지만, 내가 물을 받을 때는 '이 온도로 라면이 익긴 하나?' 싶은 생각이 정도로 물이 미지근했다. 하지만 따뜻한 물이 컵라면 수프를 녹이면서 점점 맛있는 냄새를 풍기자 이내 그런 푸념은 사라지고 붉은색의 영롱한 라면 국물에 정신이 팔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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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당장 먹고 싶다.


행군을 하면서 입이 점점 말랐던 터라 조금 전까지 식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진한 라면 냄새에 위가 트럭 엔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라면이 익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라면 한 젓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나오는 것은 짙은 웃음이었다. 김이 살짝 나는 컵라면은 물 온도 때문에 살짝 설익은 느낌이 나긴 했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자 주변에 있는 동기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컵라면을 열어 들이키듯 내용물을 삼켜갔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는듯한 느낌이었는데, 다들 욕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으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너무 빠르게 먹어서 그런지 순식간에 끝나버린 식사시간. 못내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나는 입맛을 다시며 개인정비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뒤면 끝날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자 군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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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진짜 많네.



시골이라 그런지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많았다. 이렇게 예쁜 별들이 머리 위에 잔뜩 떠있었는데, 이를 모른 채 땅만 보고 걸었던 것이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순간 찾아온 나른함에 잠깐 잠이 들려던 찰나. 저 멀리 있던 교관님의 호령에 번쩍 눈이 떠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동기들은 각자 자신의 총과 군장을 챙기고 있었고 앙 다문 입은 이미 새로운 각오를 되새긴 듯했다.


이후 다시 시작된 행군은 아까보다 더 지루하고 힘들었다. 산을 옆에 끼고 걸어서인지 새벽 3~4시부터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군장덮개와 옷에는 이슬이 맺혀 물방울이 비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피곤함과 고단함에 이끌려 말로만 듣던, 자면서 걷는 일을 반복했다. 잠에 빠졌을 때는 두 발이 움직이는 게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다가 눈을 뜨면 다시금 어깨의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왔는데, 잠을 자도 힘들고 깨어 있어도 힘든 상태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렇게 영원과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물로 채워진 뽁뽁이(에어캡) 위를 걷는 듯 발바닥의 물집이 극한의 느낌을 줄 무렵, 스멀스멀 밝아오는 시야에는 꿈에 그리던 학군교의 정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행군의 끝을 알리는 저 관문을 향해 뛰어들고 싶었지만, 우리가 출발할 때 그랬듯이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교관님에 말에 들뜬 발걸음을 진정시켰다.


이제 곧 끝난다는 부푼 마음으로 20분 정도 농로에 줄줄이 앉아 있으니 학군교 입구 쪽에서 '둥! 둥!' 하는 드럼 소리와 함께 수많은 관악기가 군가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군장을 들어 올려 그 감격스러운 문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었던 순간을 결국 이겨냈다는 감동 때문이었을까? 나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고, 군악대의 음악 소리가 가슴에 짙게 와닿았다. (비교하긴 부끄럽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개선문을 통과할 때 이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 인원 점검을 마친 뒤 복귀하여 생활관에 들어가서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동기들은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아 누구의 발에 있는 물집이 가장 큰지 비교하며 웃었고,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고 난 이후에는 발바닥 통증 때문에 엉거주춤 걸어 다니면서 서로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행군이 끝난 그날은 하루가 완전히 자유 시간이었기 때문에 교관님이 각 생활관별로 P.X를 갈 사람들을 두 명씩 모집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번쩍 손을 들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이에 같은 생활관 동기들은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사 와 달라고 나에게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하나 메모를 하며 구매해야 하는 물품 목록, 가장 위쪽에 글씨를 적었다.




육개장 컵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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