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요청? 싫음!

candidate

by 그리다

군사훈련 과목 중에는 소대전투라는 과목이 있다. 해당 과목은 장애물을 맞이할 때나 유사시에 대처를 하는 방법이 각개전투와 유사하지만, 각개전투처럼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관후보생 스스로가 소대장이 되어 다른 소대원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해당 과목은 장교로써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시험으로 여겨졌다.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점수가 다르게 매겨졌고, 만약 낮은 점수를 받는 경우 재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여러 과목들 중에서도 악평이 자자한 과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대전투 과목은 전체적으로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미리 시험을 친 동기들에게서 여러 번 소문을 들었던 과목이라, 나 또한 시험을 치던 당일에는 무척이나 긴장을 했었다.


소대전투 과목의 교장은 깊은 산속,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은 우거진 수풀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만 덩그러니 나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길의 중간에는 선글라스와 빨간 모자를 쓴 조교들이 팔짱을 낀 채 근엄하게 서있었고 조교들의 뒤로는 콘크리트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작은 벙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동기들은 당장에 통솔할 병사가 없었기에, 8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은 소대장 역할을, 나머지는 소대원 역할을 맡아서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사전에 교육을 받은 대로 동일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진행을 했는데, 시나리오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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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교가 시작 신호(무전)를 보내면 시작지점에서 소대가 출발.

2. 8명의 인원은 각자 맡은 구역을 사주경계(모든 방향을 주시하는 일)하며, 대형을 맞춘 채 천천히 비탈길을 올라감.

3. 이후 불특정한 순간에 조교가 공포탄을 발사하면 (적군의 기관총 사격 상황) 소대장은 산개를 외치며 소대원들과 함께, 길옆에 난 도랑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숨김.

4. 엄폐 이후 소대장은 무전기를 통해 현재 상황을 전달하고 본부(조교)에 지원을 요청.

5. 무전 내용에 이상이 없는 경우, 담당 조교가 답신을 하고 연막탄을 던져줌.

6. 연막탄이 퍼진 직후 소대장은 산개된 소대원들을 소집하여 꼭대기에 있는 벙커를 향해 돌격.




우리는 이렇게 정해진대로 한 명씩 각자 시험을 쳤다. 누군가는 지휘 요령이 미숙했던 탓에 "망했다."라며 고개를 푹 숙였고, 누군가는 진짜 전쟁터처럼 박진감 넘치게 지휘를 하여 박수를 받는 일도 있었다.


드디어 돌고 돌아 나의 차례. 나는 비교적 순번이 뒤였기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여러 번 숙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각각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언덕 위를 쳐다보니,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조교들의 얼굴은 무언가 표정이 없는 모아이 석상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딱딱한 분위기 때문인지 같은 조에 속한 동기들의 얼굴 또한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서로가 서로의 소대원이 되어 여러 번 수풀 속을 향해 뛰어든 탓에 전투복 이곳저곳에는 더러운 흙먼지와 낙엽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지만, 그 표정에서는 조금의 해이해짐도 느낄 수 없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무전기에서는 시작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진짜 소대장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동기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약 20미터 정도를 천천히 전진하니 어김없이 '팡-'하고 공포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신호와 함께 크게 산개를 외치며 몸을 간신히 숨길 수 있는 도랑에 바짝 엎드렸다. 그리고는 가슴팍에 있던 무전기를 꺼내어 다급하게 외쳤다.



"본부, 여기는 갈매기(가칭), 갈매기라고 알리고, 현재 적의 공용화기로 인하여 소대원 전원이 고립된 상황. 연막탄 지원바람. 이상."



이후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긴장된 상태로 무전을 통해 들릴 다음 지시를 기다렸는데, 그 순간 결코 상상해보지 못한 단어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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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음!



'엥? 뭐라고?'


나는 순간 저게 무슨 지시인가 싶은 마음에 어리둥절했다. 내 뒤로 엎드려있던 동기들도 지금 같은 내용을 들은 것이 맞는지 의아해하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는 시나리오에 없던 상황에 순간 벙찌게 되었고, 영문을 확인하기 위해 헬멧을 살짝 들어 올려 조교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씨익-'


그곳에는 무전기를 들고 있는 한 조교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나는 눈앞이 아득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려 웃고 있는 조교가 누구인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몇 초 뒤, 나는 그 조교가 우리 학교 학군단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 병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의 직위는 달랐지만 학교에 있을 때는 함께 장난을 치며 친하게 지내던 동생. 평소에도 인간미 넘치고 장난기가 넘쳤기에 같은 동기들도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던 병사였다. 그런 그가 우연히 소대전투 과목의 조교로 발탁되어 온 것이었고, 앞서 몇 번이고 지나치던 나를 보며 몰래 장난을 칠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해당 조교의 정체를 알게 되자 뭔가 어이없고 웃긴 상황에 입이 씰룩거렸다. 동생의 주변에 있던 다른 조교들도 처음에는 당황한듯한 모습이었으나 그 동생이 상황을 설명한 것인지 곧 미소를 보였고, 대놓고 웃음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그리고 싶은 말들이 잔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지금 나는 시험을 치르고 있고, 이 상황을 빨리 끝내야 했기에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는 저 친구가 인정할만한 말이 무엇일까를 떠올리며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어.. 그.. 팔다리가 점점 저려오고 있으니, 제발 연막탄 좀 지원해 주기 바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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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 오케이!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저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수초 뒤 만족했다는 듯 그의 붉은 모자가 위아래로 움직였고, "오케이~!"라는 무전과 함께 우리 앞에는 시원하게 연막탄이 던져졌다.


이후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를 뚫고, 나와 동기들은 결승선인 언덕 위의 벙커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조교들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에 소리 없는 분노를 담아 그 동생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동생은 여전히 시원시원한 미소를 내게 보이고 있었고, 나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남은 오솔길을 내달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입안을 가득 채웠지만, 아직은 조교와 교육생의 입장이었기에 나는 시작지점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 동생의 옆을 몇 번 더 달리게 되었고, 해가 뉘엿뉘엿 지며 고되었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게 되었다.


훈련이 끝난 직후 학교로 돌아가자 그 동생은 당시의 상황을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친구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입담 덕분인지 동기들은 한바탕 폭소를 했고, 나는 처음에는 얄밉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웃게 되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추억. 떠올릴 때마다 피식 미소가 지어지는, 멋진 추억을 새겨준 그 동생이 오늘따라 참 감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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