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didate
요즘도 여군의 효용성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씩 보이곤 한다. 물론 내가 겪어봤을 때도 업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체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남성 군인과 여성 군인의 차이가 꽤 많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타 비판론자들처럼 그들의 단점을 꼽으며 여군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인식을 바꾸어준 단 한 명의 동기가 과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 간부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체력은 너무나도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역량이었다. 그 이유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간부가 병사들보다 먼저 지쳐서 쓰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주변의 동기들은 다른 건 몰라도 체력과 관련해서는 군말 없이 매일매일 고된 훈련을 감내했다.
그렇게 조금씩 부족한 부분들을 성장시키다 보니 어느덧 찾아온 4주 간의 하계 훈련. 이때는 같은 지역군에 속한 장교 후보생들이 모두 모였기에 체력측정을 한 번 하는 것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히나 3km 달리기 측정을 할 때는 수 백 명이나 되는 후보생들이 쭉 이어서 서다 보니 그 길이가 끝에서 끝까지 거의 100m 남짓에 이르렀다.
서로의 학교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증명하는 자리인 만큼, 모두가 긴장했던 1차 체력 측정. 나 또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부끄럽지 않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트랙 위에 발을 올렸다. 그렇게 모두가 몸을 풀면서 간단하게 워밍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교관님께서 각 후보생들 별로 선두와 중간, 후미를 나누기 시작했다.
체중이 높아서 느린 남자 후보생과 모든 여자 후보생은 선두. 그다음으로 2급, 1급, 특급 순으로 줄을 세웠다. 이러다 보니 결국 가장 마지막 줄에는 각 학교별로 가장 잘 뛰는 후보생들이 위치했는데, 나는 대열의 중간 즈음에 자리하면서도 왜 이렇게 줄을 서야 하는지 잠시 어리둥절했다.
머지않아 나는 그 이유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기록을 측정하는 스톱워치의 작동 방식 때문이었다. 스톱워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출발선을 통과한 이후에 누르게 되는데, 그 덕분에 선두 그룹은 20초에서 30초 정도 혜택을 받게 되어, 전체적인 기록 단축을 이룰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가장 잘 뛰는 후보생들은 전혀 이득을 볼 수 없는 대열 구조였지만, 일단 내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으니 그러려니 하며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시작된 3km 체력 측정. 300m 정도를 나아갈 때까지는 얼추 대열이 유지되는 듯했으나, 결국 선두는 체력이 약하여 점점 뒤처지고, 후미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왔던 탓에 대열의 형태가 조금씩 슬링키(스프링 모양의 장난감)를 닮아갔다.
그렇게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견디며 결국 통과한 결승선. 대부분의 동기들이 중위권에서 우르르 들어왔지만 다들 체력 훈련을 많이 해서인지 그럼에도 특급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1급 기준의 동기들이 모두 들어오고, 한참 동안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서 이제 전부 다 왔겠거니 하며 자리를 정리하려는 찰나, 저 멀리서 뉘엿뉘엿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거기에는 무언가 뛴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속도로 다가오는 살찐 남자 동기 한 명과 몇 명의 여자 동기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정말로 빠르지 않아서인지, 주변에서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빨리 걷기 하는 게 저거보다는 빠르겠다."라면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나는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차분히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교관님은 스톱워치의 버튼을 누르며 마지막에 들어온 동기들의 기록을 크게 외쳤다.
15분 20초! 남군 3급! 여군 1급!
나와 주변의 동기들은 교관님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일단 남자 기준으로 3km 기록이 15분 30초가 넘어가면 아예 불합격 판정이 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 남자 동기는 이미 불합격이라는 불명예를 기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남자 동기와 똑같이 결승선을 통과했음에도 여자 동기들은 1급으로 기록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숫자가 기록지에 남겨짐에도 남자 동기는 3급, 여자 동기는 1급을 받는 현실. 나는 같은 학교에 여자 동기가 없었기에 그때까지 여군의 체력 기준이 어떤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결과가 매겨지는 모습을 보니 그 순간 무언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동기들도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와 느끼는 바가 비슷했는지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못내 아쉬운 듯, 1급 기록을 채점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여자 동기들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저번에 있었던 기록을 기준으로 대열에 맞춰 정렬해.
이후 2주일이 지나고 2차 체력측정날이 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3km 달리기를 위해 중위권 대열에 위치했다. 전체적인 대열은 저번의 모습과 거의 비슷했는데, 차이점은 이전과 달리 단 한 명의 여자 동기가 대열을 역행하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 동기는 여자니까 제일 앞에 서라는 교관님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가장 잘 뛰는 그룹인 마지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여군이 저 뒤에서 뛰어도 괜찮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2주 전에 직접 눈으로 보았듯이, 여군은 남군에 비해 체력이 좋지 않아 무조건 뒤처질 것이고, 20초 이상 손해 보는 끄트머리 그룹이기에 틀림없이 불합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불필요한 잡념이 오고 가는 사이 갑자기 울린 시작 신호. 1차 체력측정과 비슷하게 500m가량을 뛰어가니 각각의 그룹들이 용수철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중위권 그룹은 선두에 있는 여자 동기들을 앞질렀고, 잠시 뒤에는 그런 우리들을 최후미 그룹이 다시금 앞지르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멀어지는 최후미 그룹의 동기들을 바라보며 '진짜 대단한 친구들'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사이, 그 그룹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실루엣이 내가 속한 대열을 스쳐 지나갔다.
우락부락한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뛰고 있는, 작지만 탄탄한 체격의 신체. 그는 아까 웃으며 최후미 그룹으로 걸어갔던 그 여자 동기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여자 동기를 보면서 다시 한번 '저 페이스대로 뛰면 금방 지칠 텐데.'라는 생각을 했으나 그 여자 동기는 나를 비웃듯 점점 더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에서 사라졌다.
숨을 헉헉 거리며 결승선에 다다르자 그 여자 동기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 그룹의 기록을 확인해 보았는데, 그들은 10분대 초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달성해놓고 있었다.
12분 30초 이내로 들어와야지만이 받게 되는 특급. 특히나 여군은 15분 이내로만 들어오면 되었음에도, 그 동기는 그런 여군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남자 동기들도 달성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정상급 마라토너가 1km 당 2분 50초대를 기록하는데, 이들은 1km 당 3분 20초대를 기록한 것.)
물론 이후에는 그 여자 동기를 향한 칭찬 세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냐?"라는 질문부터 "진짜 대단하다."라는 존경의 말까지. 그것은 그가 이성이라서 하는 칭찬이 아니라 '같은 무게를 짊어진 동기'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칭찬이었다.
이후에 그 여자 동기는 하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인기 스타가 되어 교관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많은 장교 후보생들의 귀감이 되었던 탓에 당당히 우수 훈련생 명단에 오르게 되어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덕분에 학교로 돌아와 모든 여군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내 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또 혹여나 여군 모두를 비난하게 되면, 훌륭히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있을 그 여자 동기까지 함께 욕하는 것이 되니 함부로 편견을 가지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새긴 여군에 대한 생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쭉 이어져 나의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시켜주고 있다. 그 동기와 같은 멋진 군인이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