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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Jan 05. 2021

비와 고양이

[에세이]


 2013년 가을, 나는 큰 이모님 댁의 옥탑방에서 몇 달간 신세를 지고 있었다. 큰 이모님 댁은 비탈길을 따라 지어진, 작은 마당과 대문이 있는 주택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산 중턱에 위치한 대학교가 보였고 비탈길 아래로는 걸어서 10분여 거리에 지하철 역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신세를 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에는 이모님께서 흔쾌히 오라고 말씀해주시면서 옥탑방보다는 본인이 살고 계시는 1층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지만 나는 그 이상 신세를 지는 것이 너무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었던 탓에 한사코 거절하여, 창문을 열면 바로 널찍한 옥상이 보이는 두 평 남짓의 작은 옥탑방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어 달의 시간을 옥탑방에서 보내던 어느 날 아침, 여느 날처럼 가을을 맞아 공기는 싸늘했고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굵은 비를 뿌리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오후에 더 큰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를 했지만 사실 날씨가 어떻든 간에 나는 내게 주어진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비가 오든 말든 평소의 덤덤한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날 하루도 평온하게 흘러가길 바랐지만 계획이란 언제나 엇갈리고 뒤틀리기 마련이었다. 아침부터 나의 일정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로 인해서 계속 뛰어다녀야만 했고,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일 때문에 모든 스케줄을 빠듯하게 마무리하게 되어 쉬는 시간이면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벤치에서 긴 한숨을 내쉬기 일수였다.


 그렇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 비는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오직 핸드폰만이 여섯 시를 알리며 내게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낮이 짧은 계절이었기에 집을 걸어 올라갈 때마다 땅거미 또한 같은 속도로 점점 짙게 깔리고 있었고, 하루 종일 내렸던 비 때문에 오르막뿐인 좁은 골목길에는 빗물이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 내 신발을 적시고 있었다. 어쨌거나 무겁고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끝내 집에 다다라 삐걱대는 대문을 열 열쇠를 찾고 있을 때 내 시선의 한참 아래쪽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하악!"

"... 어?"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기에 사실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빗소리에 묻혀 이 작은 생물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있던 곳에서 왼쪽 아래를 내려다보자 대문 구석에서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이모님 댁 대문 위로는 30cm 남짓되는 작은 처마가 있어서 웅크린 고양이가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바닥에서 튄 빗방울 때문에 머리와 몸 이곳저곳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날따라 많이 지쳤기 때문이었을까, 왠지 처량해 보이는 그 모습이 퍽 내 모습과 같아 보여서 코앞에 있는 나의 방을 뒤로한 채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는 대문 앞, 작은 문턱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무릎 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우산으로 아무렇게나 가린 후 가만히 고양이를 응시했다. 가까이서 보니 새끼 고양이는 전체적으로 하얀 털에 오른쪽 눈과 꼬리 쪽에 검은 무늬가 있어서 왠지 모르게 턱시도를 입은 도시의 신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기를 닦아주려고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자 다시 한번 고양이는 하악질을 하였지만 그 모습이 의외로 하찮기도 했고 내가 이 녀석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딱히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물기를 닦아주는 내내 무언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인지 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길을 받아들였다.


"왜 여기 웅크리고 있어? 엄마를 기다리니?"


 아기 고양이는 나의 물음에 멀뚱히 나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고 나 또한 그 모습이 너무 당연했기에 비가 내리는 회색빛 하늘을 그냥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 가녀린 생명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 냄새가 많이 베이면 어미 고양이가 데려가지 않는다는 말을 얼추 들은 것 같아서 팔짱을 낀 손으로 그저 소매만 몇 번 만지작거렸다.


"같이 기다려보자. 엄마는 꼭 올 거야."


 그렇게 한 시간여를 그 자리에서 고양이와 함께 비가 오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는 담벼락과 지붕 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미 고양이는커녕 살아있는 것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비는 더 굵어져 풍경 여기저기를 '쏴-' 하는 소리로 가득 채웠고, 내리는 장대비는 무릎을 가리고 있던 우산을 따라 흘러 이미 바지와 신발을 한껏 적셔놓고 있었다. 서서히 더해져 가는 축축한 느낌이 약간의 불편함으로 떠오르려던 찰나에 새끼 고양이가 있는 힘껏 울음소리를 냈다.


"야-옹"


 풍경에 삼켜질 듯 목적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그 울음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새끼 고양이에게로 가져갔는데 저녁의 추위 때문인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추운데 얘는 얼마나 추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서둘러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가져온 두꺼운 수건 몇 개로 새끼 고양이를 감싸주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수건을 감싸기 위해 고양이를 잠시 품에 안았을 때 나는, 이 작은 생명이 보기보다 너무나도 여리다는 것과 생명의 불길이 이내 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 그 무게가 무척이나 가볍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기다림을 맞이하는 태도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새끼 고양이가 나보다 더 능숙한 것 같았다. 조바심을 못 이긴 나는 결국 집 앞에 있는 마트로 달려가고야 말았다. 새끼 고양이는 아무거나 먹이면 배탈이 나서 죽을 수 있다는 말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터라 마트 직원에게 새끼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게 어떤 것인지 물어본 후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캔을 몇 개 골라 집으로 들고 왔다. 그렇게 사들고 온 차가운 펫 밀크를 데우기 위해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것이 새끼 고양이가 먹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며 계속 캔에 적힌 주의사항과 안내사항을 자세히 읽고 또 읽었는데, 그때가 아마 내가 살면서 캔으로 된 식품의 내용물과 안내사항을 가장 자세하게 읽었던 때가 아니었다 싶다.


 그렇게 그릇에 담긴 따뜻한 고양이용 펫 밀크를 새끼 고양이 앞에 슬쩍 내밀고는 나는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처음 그릇을 놓을 때는 사기그릇과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내는 마찰음 때문에 고양이가 한 껏 움츠러들었는데 그 모습을 본 나도 되려 놀라서 되도록 그릇을 천천히 놓으려 노력을 했다. 한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옆에서, 작은 혓바닥으로 액체를 핥는 소리가 났다. 확인을 하려고 했던 탓인지 몇 번의 할짝 하는 소리와 정적이 반복되었고 이후에는 그 간격이 점점 줄어들더니 그릇을 핥는 소리가 이내 빨라졌다. 쳐다보거나 움직이면 괜히 또 움츠러들까 봐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에 귀만 기울이게 되었고,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그 작은 식사 소리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한 시간쯤 뒤 비는 조금 잦아들었고, 오늘따라 늦게 퇴근하신 이모님께서 골목길 멀리, 빛나는 가로등을 지나 걸어오고 계셨다. 내가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이모님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앉아있느냐" 라며 물음을 던지셨고 나는 "문 앞에 새끼 고양이가 있어서 그냥 잠깐 같이 앉아 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이모님은 수건에 쌓인 새끼 고양이를 한 번 스윽 보시고는 "시간이 늦었으니 오래 기다리지 말고 금방 들어와라'라는 말씀과 함께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셨다.


 한참을 기다리며 생각해보니 정말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고양이를 내가 사는 옥탑방으로 들여서 키우면 요 몇 달은 안전하겠지만 이후에 어떻게 될지가 불확실했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게 두자니 자칫 오늘 밤 어미 고양이가 찾아오지 않으면 새끼 고양이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깊게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여태껏 살면서 낳은 새끼를 버리는 어미 고양이를 본 적이 없으니, 엄마는 분명 꼭 올 거야"


 축복을 빌듯 새끼 고양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나는 문 너머 계단을 올라 내가 사는 옥탑방으로 향했다. 새끼 고양이를 홀로 두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러면서도 역시나 마음은 불안해서였는지 방 안에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대문이 내려다보이는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서 어미 고양이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에 있는 집들의 지붕과 담벼락을 유심히 또 살피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나도 내일 아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결국 방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옥탑방은 천장이 그리 높지 않아서 가끔 밤에 고양이가 지붕 위로 올라가면 사뿐히 걷는 발소리가 들렸는데, 그날은 지겹기만 했던 그 발소리가 꼭 들려오기를 소망했다. 불 꺼진 방에 누워있으니 빗줄기는 다시 굵어져 지붕과 옥상을 제멋대로 두드렸고, 그 소음들 사이로 인근을 지나는 자동차가 '쏴아'하고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내고 있던 때


'타닥-톡톡톡'


  지붕 위를 오르는 어떤 낯익은 짐승의 발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분명 고양이의 발소리긴 한데 이 고양이가 진짜 어미 고양이인지 아니면 새끼 고양이를 해코지를 할 다른 고양이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기대 반, 초조함 반으로 그 움직임을 귀로 읽고 있었다. '나쁜 고양이면 새끼를 지켜주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기새로 숨을 죽이고 있던 찰나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옹'


 성별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어른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골목을 가득 울리는 울음소리에 기다리던 답신이 들리지 않자 다시 한번 울음소리가 밤을 갈랐다.


'야----옹'

 

 살면서 여러 번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지만 이 소리는 고양이끼리 영역다툼을 하거나 싸우기 위해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뿐히 걷던 고양이의 발소리는 어느새 지붕을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나는 내심 새끼 고양이가 어서 그 울음소리에 답하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아주 잠시 뒤, 빗소리 때문에 혹여나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가 싶어 창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다행히도 새끼 고양이가 있던 대문 쪽에서 두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번갈아가며 들리고 있었다. 한동안 서로를 확인하려는 듯, 두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무렵에는 빗소리만 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몇 시간 못 자긴 했지만 참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비는 밤새 잦아들어 아침 해는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전깃줄에 앉은 새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맑은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계단을 내려와 대문을 열었고, 새끼 고양이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덮어주었던 흰 수건과 빈그릇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내심 미소를 지으며 그릇과 수건을 대충 방에 던져 넣고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비탈진 골목을 뛰어내려 갔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습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공기도 맑아지고 기온도 적당했기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새롭게 맞이한 하루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또 날씨는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것이든 좋으니 당분간은 작고 불안한 손님이 길을 잃어 집 앞으로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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