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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Jun 03. 2021

외향적인 사람에 의한 기준

 번화가를 걸으면서 보게 되는 플래카드나 인터넷 속에서 떠도는 광고를 읽다 보면 간혹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교양 있는 사람의 기준', '좋은 직장인의 기준', '성공하는 사람의 기준' 등등. 나는 어떤 개념에 대해서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이런 기준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준들이 대부분 외향적인 사람들이나 특정한 집단에 맞춰져 있는 것만 같아서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는 표현이 미숙한 내향적인 사람이나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진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 기준이라는 것을 세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대상을 찾아가 "이 기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때 외향적인 사람이나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스스럼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질문을 회피하거나 대화를 빨리 끝내기 위한 임기응변식의 답변을 하고 만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면 해당 기준에는 외향적인 사람들의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반영되게 되는데, 이것이 개념화되는 순간 '다수의 의견'이라는 탈을 쓴 특정인만을 위한 기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앞서 행동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 맞추어 변화하고 적응해가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또 당연한 기준으로 삼아서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나처럼 본인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을 하는 것은, 키우고 있는 강아지에게 "너도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다니면 편하지 않느냐?"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애초에 강아지는 네 발로 걷게끔 태어났듯이 내향적인 사람들도 타인에게 의견을 피력하고 영향을 끼치려 하기보다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속으로 고민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해결되게끔 변화하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구분 지어 놓은 이런 기준들은 사람을 이해하는 이정표와 같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이런 기준들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서로 간의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서 연인에게서 온 메시지에 오랫동안 답을 하지 못했을 때 상대방이 '답장이 빨리 오지 않으면 당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라는 기준을 맹신해버린 상황이라면  답장을 받지 못한 쪽은 혼자서 깊은 실망감에 빠지게 된다. 이후에는 '일이 있어서 답장이 늦어졌다."라며 미안함을 표현하는 상대방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게 되는 상황로 이어지면 결국 서로 간의 오해가 발생된다. 이처럼 표준화된 기준과 그것을 맹신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정의를 내리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면서 그 기준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게 되는데, 나는 이와 같은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순리인가에 대한 의문을 항상 떠올린다.


 오늘도 외향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준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신중하게 판단하거나 본인만의 방법으로 천천히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기준들에 의해서 비난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일방적인 기준들이 이해의 수준을 넘어 당연한 틀이 되어버리는 것을 모두가 경계했으면 한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인 만큼 어떤 한 가지의 개념으로 상대방을 구분 짓지 말고 개개인이 서로 다른 성격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인지해주길 바란다. 상대방이 가진 특별함과 다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이 건네는 진심을 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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