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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Jun 09. 2021

속초의 기억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던 2019년 겨울, 나는 무료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특별한 계획도 없이 속초로 가는 심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 밖은 어두웠지만 나의 걸음을 축복하듯 별은 밤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피곤함이 몰려와 잠깐의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사이, 창을 스며드는 스산함은 곧 내가 닿고자 했던 속초에 다다랐음을 내게 알려왔다. 긴 시간을 달려 도착한 속초. 버스에서 내려 처음 발을 디딘 수복탑 사거리에는 파란 표지판 위에서 여러 갈래로 나눠진 화살표들이 '어디로 가도 괜찮으니, 어서 이 설레는 곳을 걸어보라'며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을 향하 걸음을 옮겼다. 속초항과 금강대교를 지나 설악대교 위를 걸어가고 있을 때, 인근 부두에서는 한적한 도로와는 달리 무언가 분주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 불빛 사이로 짐을 나르는 인부의 모습. 나는 가장 먼저 일어나 새벽을 깨우고 있는 인부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와 동시에 도망치듯 속초로 와버린 내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나는 속초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새해를 맞이한 지 몇 주가 지나있었으나 아직 그 설렘은 모래사장 이곳저곳에 가득했다. 시린 손을 비비며 새벽에도 장사를 하고 있는 카페로 달려가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여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따뜻함을 맛볼 수 있었다. 갓 뽑혀 나온 따뜻한 커피.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닷가. 새벽 공기를 녹이는 커피의 온도처럼 속초의 풍경 또한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출이 시작되고 모래사장 위에는 뛰어노는 아이들과 팔짱을 끼고 바다를 바라보는 연인들의 모습.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입김을 내뿜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나이 든 부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갓 올라온 태양으로 인해서 주황색으로 물든 바다. 그리고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져 있는 설렘들은 속초를 정말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 이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얼마 동안 해변을 거닐다가 속초의 역사의 단편을 머금고 있는 아바이 마을이 궁금해져서 그리로 가보기로 했다. 조금 전 대교를 걸으면서 지나왔던 길인데 아침 해를 받으며 빛나는 마을의 모습은 어딘가 정겨우면서도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마을 곳곳에 세워진 간판을 통해 읽어가는 아바이 마을의 역사. 등 뒤에서 울리는 마을을 가득히 채우는 잔잔한 파도소리에, 그 옛날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삶을 이어갔던 피난민들의 사람들의 아픔과 시련이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다음으로는 버스를 타고 기대하던 설악산으로 향했다. 차가운 날씨에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은 능선에 쌓여 설악산이 가진 웅장한 기품을 한껏 더해주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 도착한 케이블카를 통해 산으로 올라가는 길. 나는 멀리서 홀로 솟아있는 신기한 바위를 보며 영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절경이라고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케이블카 안에서 들려오는 해설을 통해 그 바위가 '울산바위'임을 알 수가 있었다. 문득 지어지는 미소. 울산바위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아마도 울산바위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설악산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곳에 자리 잡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한 곳에서 내려다본 곳에는 쌓인 눈이 만들어낸 새하얀 바다와 초록의 파도가 어우러져 가슴을 뛰게 하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이 터질 듯 공기는 너무나도 시원했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설악산의 풍경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했다. 이 시원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가슴에 담기 위해서 내가 이곳에 온 것이구나 하고.


 간단한 설악산의 트래킹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때 내 가슴은 여러 감정들로 인해서 울리고 있었다. 생각한 것 이상의 것을 이곳에서 맛보았다는 성취감, 행복, 그리고 멀어져야 하는 아쉬움. 그렇게 많은 감정을 남기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하였다. 일상에서의 쉼표가 필요해지는 날 다시 한번 이곳에 오겠노라고. 지금 몸은 떠나가고 있지만 내가 이곳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과 떨림은 여전히 이 속초 구석구석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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