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사람을 잃는 게 더 싫다.

[에세이]

by 그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의 시간 동안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친구가 있었다. 평범한 키와 시원시원한 성격에 엉뚱함과 더불어 뛰어난 사교성을 지니고 있던 그 친구는, 어찌 보면 나와는 정반대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가진 특유의 살가움과 유쾌함을 통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유독 사람을 좋아했던 탓에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고 경조사를 챙길 만큼 성실했고, 친구와 함께 술자리도 즐겼는데 가끔 나와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미역 채취부터 주유소 아르바이트까지 안 해본 일이라고는 거의 없는 자신의 고된 삶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고 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묵묵히 들어주었던 터라, 우리는 서로에 삶에 대한 칭찬과 존중을 통해 서로의 깊음을 이해하는 관계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장교로 임관했던 그 친구의, 길었던 3년간의 군 복무가 끝나고 전역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가을의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한 가지 비보가 전해졌다. 자신의 아버지께서 오랜 지병이 있으셨는데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투석을 받아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서 밤새도록 고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지만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결국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전화를 하게 되었고 순번이 흘러가듯 결국 나에게 까지 전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친구의 집안 사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친구는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부탁을 하였다. 긴 이야기를 마친 끝에 그 친구에게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달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던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취업을 하기 위해 남은 돈을 대부분 자취방 계약금으로 쓰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나였기에, 통장의 잔고는 생각만큼 그리 풍족하지가 않았다. 식비나 기타 여비를 아낄 방법을 계산해가며 간신히 모은 돈이 50만 원. 잘 쓰이길 바라며 뿌듯하게 모아서 보낸 그 돈이 사람을 그 친구를 내게서 멀어지게 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인지, 이따금씩 전화가 와서 밥을 먹거나 간단한 술 한 잔 하는 것은 이전과 같았으나 이제는 마주칠 때마다 인사말 대신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돈은 내가 금방 벌어서 꼭 갚을게, 정말 미안하다.'라는 그 말이 나의 가슴을 무척이나 서늘하게 했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친구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딱히 돈을 돌려받지 않을 마음으로 '안 줘도 괜찮으니까 괜히 마음에 담지 말고 편하게 보자.'라고 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과거에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나누던 당당한 친구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얼마 뒤, 그 친구는 재입대를 결심하여 시험을 거쳐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고 그로부터 약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특별한 연휴를 제외하고는 그 친구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때때로 다른 친구들에게 '걔가 잠수를 탄 것 같은데, 돈을 괜히 빌려준 꼴이 됐네'라며 염려 섞인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도 취직을 하고 충분한 만큼 돈을 벌고 있었기에 빌려준 돈에 대해서는 그리 미련이 없었다. 다만 그 친구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빌려줬던 돈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녔던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게 마음을 내놓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일을 끝낸 어느 가을날 저녁, 주머니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던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졌다. 또 금융상품 안내다 뭐다 하는 스팸 문자가 왔거니 싶어 심드렁하게 화면을 열었는데, 그리웠던 그 친구의 이름이 떠있었다. 순간 내용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궁금했다기보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에 더 행복했다.


보내온 문자의 내용은 꽤 장문이었는데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을 서두로 '돈 빌리고 연락 안 한 거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라는 말과 '일부러 연락 안 한 게 아닌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진심 어린 말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는 빌려줬던 돈을 내게 부쳐주며 입금이 됐는지 확인을 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친구가 그동안 안고 살았을 부담감과 무거움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기에 괜히 부담이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언제나처럼 '안 줘도 되는데 뭘 또 챙겨주냐'며 장난스럽게 웃었고 그 친구도 이에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있던 서로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그 친구는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이번에 휴가를 받으면 고향에 내려와 술을 한 잔 사주겠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끝맺음을 하였고 나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때 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안녕을 표했다.


서로 바쁜 나날을 살아가고 있기에 만날 날짜를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언제고 반드시 익숙했던 고향의 어느 한적한 곳에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웃음을 터트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날이 오면 나는 친구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들뜬 나머지, 아마 그 친구보다 먼저 지갑을 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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