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비가 오기 전 잠깐 느낄 수 있는 옅은 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울 때면 나는 어김없이 가슴이 뛰곤 한다. 왜냐하면 나는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을 가장 사랑하고, 비가 내리는 풍경을 산책하거나 조용히 지켜보는 일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SNS상에 존재하는 나의 모든 프로필 사진은 비가 오는 날의 사진이다.) 나는 어째서 맑은 날의 하늘보다 흐린 날의 하늘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일까.
비가 내리던 날 행복했던 기억중 가장 오래된 기억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6살 때의 유치원 생활이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떠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몇몇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함께 하원을 했고, 또 몇몇의 아이들은 분홍색, 노란색의 장화를 조심스레 신고는 혼자의 힘으로 우산을 펼쳐 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도 했는데, 나는 현관문의 처마 밑에 가만히 서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과 비가 오는 하늘을 번갈아보며 마냥 미소만 짓고 있었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쁘시기에 당연히 오지 않으실 걸 알고 있었고, 사실 걸어가더라도 유치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정말 가까웠기에 다른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라던지 아쉬움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을 때의 내 기분은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에 흠뻑 젖으면 되게 즐겁지 않을까?'라는 느낌과 유사했는데 아마 그때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같은 또래에 누군가가 빗속을 뛰어갔다면 나도 한 번 따라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후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로 넘어간다. 아마 이 시절부터 비가 오는 느낌을 습득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때 피부를 얇게 감싸는듯한 습기와 물에 젖은 콘크리트 냄새가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아! 밖에 비가 오는구나'하고 깨닫게 되어 하루의 시작을 미소로 물들이게 되었다. 보통 비가 오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올 때 우산이 있음에도 종종 비를 맞으며 걸어오곤 했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이 없는 경우에는 조용히 입던 옷을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해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지만 부모님이 계실 때 이렇게 귀가를 하면 "아이고~ 진짜! 아침에 우산을 챙겨 줬는데도 또 비를 맞고 왔냐'라며 혼나게 되었다. 이후에는 빠르게 현관에서 발가벗겨진 뒤 샤워를 끝내고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 15분 정도를 '다음에는 그러면 안된다.'라는 주제로 꾸지람을 들었는데, 이런 경고에도 나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아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가끔씩 비를 맞으며 다녔던 것 같다. 요즘은 당연히 그러지는 않지만 살짝 미치면 즐겁다는 말이 있듯이, 앞이 안보 일정도로 소나기가 몰아치는 날에는 어차피 우산을 쓰나 마나 다 젖기 때문에 그냥 다 포기하고 걸어보면 그 속에서 나름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비를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가 오는 날에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있다는 걸 깨닫고 그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유난히 생각나는 따뜻한 국물음식이나 면 종류 특히 칼국수, 찌개, 라면, 짬뽕 등등의 음식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며 파전과 막걸리의 조합이라던지 혹은 친한 친구와 나란히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어묵탕에 소주 한 잔 하는 것은 정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만날 계획을 어렵게 잡아놓았는데 당일날 비가 온다면 실내에서 즐길만한 무언가를 찾게 되는데 이때 생각나는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카페, 영화관 등의 공간은 맑은 날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아늑함과 감사함을 전달해준다.
또 비가 오는 날에 산책을 하면 정말 즐거운 것이 북적대던 거리가 비로 인해 한산해져서, 오로지 비 내리는 소리와 나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그 조용한 거리를 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며, 표정을 구긴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비가 내리는 풍경에는 나와 같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맑은 날에는 조용히 숨어있다가 비가 오는 날만 되면 고개를 드는 그 특별한 사람들을 보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저 비 내리는 풍경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각과 느낌을 나눌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이런 풍경을 걷다 보니 빗소리란 그저 비가 내리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악기가 내는 소리가 합쳐져 '클래식'이라는 음악을 표현하듯이 '빗소리'도 카페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동차의 바퀴소리, 광장을 내달리는 어느 신사의 구두 소리처럼 비가 옴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소음이 어우러진 하나의 웅장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뉴스에서 주중에 비가 온다는 말이 들리면 괜히 기분이 좋다. 비가 오기 전날 밤 찾아드는 습기는 가슴을 뛰게 하고, 쏟아 내리기 전 톡톡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물방울은 내일 아침에는 어떤 우산을 쓰고 나갈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또 어떤 사람들이 비가 내리는 거리로 나와 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비는 나에게 있어 설렘이자 분명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