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록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록이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을 써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의 마음과 느낌을 담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깊이 있는 기록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에는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기록에 영혼이 있다면 진동에 공명하는 유리잔처럼 훗날 다시 보았을 때 그 마음에도 울림이 있을 테니까.
기록이란 사실 귀찮은 일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인간으로서 필요한 행위지만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다.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신뢰한다. 그리고 결과라는 단맛이 존재하는 일에 깊이 매진한다. 기록은 이런 단맛이 없다. 그래서 밋밋한 빵처럼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밋밋함은 기록이라는 단어를 우리 삶 속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불필요한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행위지만 어느샌가 기록은 시간이 남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취미로 전락해 버렸다.
빛바랜 장롱 속에서 낡은 일기장 찾았다. 아직 표지를 열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벌써 두근거린다.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그날의 기억은 첫 글자를 읽는 순간 맑은 오아시스가 되어 선명히 눈 앞에 나타난다. 잊고 살았던 예전의 이름들을 발견해낸다. 분명 잊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이름들인데도 잊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런 식으로 잊어간 이름들이 없는지 곱씹는다.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난다면 그것은 잊은 게 아닐 테고, 잊은 것은 이렇게 쉽게 기억나지 않을 테니.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적힌 글씨들을 좇는다. 검은 잉크 위엔 그때의 내 마음과 기록된 자의 마음이 있다. 와인은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나는 오래된 기억일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록한 자에게는 일기장이 곧 멀티미디어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종이와 잉크지만 그 속에서 소리도 들리고, 사람도 움직이며, 색깔도 보인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쓰는 일기와 지금에 와서 쓰는 일기의 차이. 같은 행위라도 그것을 과제로 여기느냐, 아니냐의 차이. 나는 기록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 기록이란 보기보다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는 기록 또한 잘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우리는 기록을 시작하는 것을 꺼린다. 써놓고 보니 왠지 부끄러운 글처럼 느껴져서. 무언가 쓰면 안 되는 글 같아서. 하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타당한 결정에 의해서 발현되기에, 기록되어서 부끄러운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을 함으로써 부족하다 여긴 행위에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으니 기록은 어찌 보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더하는 일이라고 본다.
기록은 그럴듯해 보일 필요가 없다. 비싼 종이를 쓰고, 비싼 만년필을 쓴다고 해서 그만큼의 가치가 묻은 기록이 나오지는 않는다. 진정한 기록의 가치는 내면에서 나온다.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의 손을 잡으면 그 떨림이 머리와 심장을 거쳐 손끝으로 표현된다. 바구니에 담은 과일은 오래 두면 썩지만 기억은 썩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될수록 기록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뒤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깃들어 있기에. 그래서 나는 기록을 남긴다. 눈이 쌓인 거리를 내달리는 어린아이의 발자국처럼 제멋대로인 기록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 써 내려간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남긴 초라한 발자국이자 나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