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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Aug 20. 2021

마라도 짜장면

 얼마 전 나는 마라도를 다녀왔다. 우리나라 국토의 최남단이라 불리는 섬. 나는 특별한 경험이나 휴식을 바라고 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열망. 짜장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마라도를 처음 간 것은 아니었다. 7년 전 여름 나는 친구들과 마라도에 있었다. 과거 고등학생이던 시절 수학여행차 제주도에 처음 왔던 나는 정해진대로 갈 수밖에 없는 여행코스와 상품 강매가 끼어있는 여행상품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좀 더 자유롭게 제주도를 즐기고 싶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오전이면 제주도의 풍광이나 유적지를 방문하고, 해가 지고 나서는 숙소에 돌아와 바비큐 파티를 하는 전형적인 여행객의 일정. 살랑이는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이튿날 저녁, 모닥불이 피워진 숙소 마당에서 나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겪었던 일들을 나누며 다음날 일정을 확인했다. 내일은 오전부터 마라도를 간다는 일정. 한 친구가 들어가는 배의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늦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마라도를 상상했다. 바람이 불면 기다랗게 자란 풀들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모습. 초록의 평지와 푸른 바다,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멋진 섬. 나는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렸다. 그리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마라도를 향하던 나의 몸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전날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던 것인지 머리가 어지러웠고, 산이수동으로 이동할 때 탔던 버스가 구불길에서 난폭하게 운전했던 탓에 불쾌감이 더해져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받은 것이다. 젤리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이끌어 어찌어찌 표를 끊어 마라도로 향하는 배에 오른 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멀미는 일반적인 고통을 능가한다는 것을 배웠다. 친구들과 함께 배의 루프탑에 자리를 잡고 출발을 기다리던 중 나는 배가 너무 아팠다. 친구들에게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계단을 내려가 배 한편에 위치한 화장실을 발견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한 걸음씩 화장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 순간 '부웅-' 하는 기적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여객선. 분명 3초 전까지 배가 미칠 듯이 아팠는데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듯 갑자기 배가 아픈 느낌은 사라지고 멀미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나는 멀미를 하겠다는 느낌이 배가 아픈 느낌보다 더 심한 고통인 것이구나를 깨달은 후 이내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 자리로 돌아오자 친구들이 "괜찮냐?"며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 와중에도 배는 파도에 의해 심하게 흔들려 나를 못살게 굴었다. 이윽고 살레덕 선착장에 도착을 한 나와 친구들. 부들거리는 두 다리 때문에 선착장을 오르는 낮은 언덕길은 높은 하이킹 코스를 보는 듯 나를 좌절하게 했다. 친구들은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 "멀리까지 왔는데 빨리 한 번 걸어보자"라며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나는 이미 세상이 핑핑 도는 듯 어지러웠기에 친구들에게 "나는 그냥 두고 너희끼리 다녀와"라고 말하고는 그로기 상태의 복서처럼 벤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가파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라도를 일주한 친구들이 어느새 나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지금은 좀 괜찮냐?"라면서 격려도 하고, "저쪽으로 가보니 진짜 예쁘더라"라며 자기들이 본 풍경을 상세하게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나는 여기까지 와서 고작 본 것이라고는 지금 앉아있는 벤치 정도밖에 없다는 것에 슬퍼졌다. 몸이 좀 더 괜찮아지면 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돌아가는 배 시간이 2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마저도 포기하기로 했다. 친구들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남은 시간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여기까지 왔는데 짜장면은 먹고 가야지!"라며 목소리를 높여 주변 친구들을 자극했다. 나는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이 마라도까지 와서 너무나도 맛있게 짜장면을 흡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라도 짜장면은 당시 너무나도 유명했기에 함께 온 관람객들도 짜장면을 생각하고 왔을 것이다. 나는 멀미로 인해 배가 찌르르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입맛이 다셔졌다. 속으로 '나도 짜장면 먹고 싶다.'라며 생각하던 찰나, 또 다른 친구가 "배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안전하게 그냥 여기 있자."라며 현실적인 조언을 했지만 이미 짜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린 친구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마음이 맞았던 4명의 친구들은 이내 저 멀리 보이는 식당으로 달려갔고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었다. 주문하고 나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뚫고 그들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처럼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배를 두드리며 돌아왔다. 돌아온 친구들에게서는 양파와 고기가 함께 볶아졌을 때 풍기는 고소한 짜장면의 냄새가 났다. 점점 진해지는 짜장면 냄새와 맛에 대한 상상은 나의 배고픔을 자극했고, 이내 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짜장면을 갈망하는 좀비처럼 변해있었다. 돌아가는 배의 검표가 시작되고 긴 줄 뒤에 선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저 짜장면을 먹을 것이라고.


 그로부터 7년 뒤. 나는 그때의 다짐을 잊지 않고 다시 마라도 가고자 제주도에 발을 들였다. (그 사이에도 제주도를 왔기에 마라도를 갈 기회가 몇 번 있긴 했으나 기상상황이나 함께 온 지인들의 일정으로 인해서 자꾸 미뤄졌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을 하고 보니 이번에는 마라도발 배가 출항하는 항구가 운진항이었다. 온전히 그때의 느낌을 살려 산이수동에서 출발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얼른 운진항으로 향했다. 날씨는 구름이 살짝 끼어있었지만 푸르렀다. 출발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하여 멀미약도 잊지 않고 챙겨 먹었다. 선착장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으니, 스피커에서는 탑승 준비를 하라는 안내원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항구에 묶여 있음에도 살짝 흔들리는 유람선. 나는 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과거의 두근거림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되어 배는 출발하고 먼바다로 나가니 잔잔하던 바다는 이내 파도를 보내왔다. 유리창은 3~4미터가량 튀어 오른 바닷물로 인해 젖고, 나는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다시 멀미 기운이 도졌다. 나는 그때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겹쳐지며 속으로 '이번엔 진짜 아프면 안 된다.'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기도 하고, 먼바다를 보기도 하면서 꾸역꾸역 멀미 기운을 억누르길 30분 여. 드디어 자리덕 선착장에 도착했다. 나는 언덕 위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한 걸음씩 마라도를 향해 올라갔다.


 선착장을 올라가자 바로 앞에 편의점과 식당들이 보였다. 모든 짜장면 집이 자신의 가게의 장점을 써놓거나, 원조라는 간판을 다는 등 특색음식이 있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마음으로는 당장에 짜장면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나는 2시간이나 남은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자 우선은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가파도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가서 7년 전 내가 쉬고 있었던 살레덕 선착장 앞쪽 자리에 한 번 앉았다. 그러곤 이내 바람이 일렁이는 섬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 언덕에 넘실거리는 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등대와 성당, 최남단을 알리는 비석 등을 차례대로 찍었다. 마라도를 산책하는 내내 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이렇게 예쁜 풍경을 두고 앉아만 있었던 게 후회된다.'라며 그때의 나를 아쉬워했다. 마라도를 천천히 일주하는데 약 한 시간이 걸리고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짜장면집을 향해 걸어갔다.


 과거에 친구들이 뛰어갔던 동선을 그리며 얼추 이곳이다 생각되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밖에 놓인 테이블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짜장면을 주문하고 에어컨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창 밖을 보니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와서 맛있게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점점 더 아득해졌다. 주방에서 흘려 나오는 짜장면의 냄새는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소박한 그릇에 담겨 나온 짜장면 한 그릇. 나는 흘러나오는 미소를 꾹 참고 눈을 감았다. 과거에 곤죽이 되어있던 나와 친구들의 모습. 여기 오기까지의 긴 여정. 그리고 내륙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떠올랐던 마라도에 대한 열망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기분으로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통통한 면 위에 올려진 짜장 소스. 반들반들한 소스 아래에 어우러진 고기와 야채들이 보였다. 면과 소스를 섞기 위해서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치덕치덕' 소리가 나는 그릇. 그리고 면이 한 번 뒤집힐 때마다 올라오는 볶아진 고기와 채소의 냄새. 오감을 자극하는 짜장면의 모습에 나는 검은색으로 변한 면을 집어 허겁지겁 입으로 넣었다. 고생하면서 왔으니 조금 더 천천히 음미하자는 생각을 했지만 면을 집는 두 손은 속도를 더해갔다. 짜장면이 특별히 맛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는 않았기에 감동은 오히려 더해졌다. 무언가 내륙에서 먹는 짜장면과 확연히 다르다 할 만한 것은 없었고 맛 또한 평범했지만 나는 추억이 주는 색다른 맛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오마주처럼 떠오르는 무한도전에 나온 정형돈과 유재석의 모습. 이 멀리까지 왔음에도 짜장면 한 그릇을 먹지 못하는 아쉬움과 마침내 짜장면을 먹게 되었을 때의 쾌감이 함께 가슴을 스쳤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만에 게 눈 감추듯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버린 나는 행복에 겨운 채로 짐을 챙겨 식당 밖으로 나왔다.


 마라도에 올라올 때 봤던 관광객의 모습처럼 나도 그 자리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돌아가는 배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별 탈 없이 마라도를 빠져나와 직행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 약간의 졸음이 몰려왔다. 이동시간이 넉넉했기에 잠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로 오늘 있었던 일과 의의를 되새겼다. 남들에게는 고작 짜장면 한 그릇을 먹는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오랜 시간을 거쳐 쌓아 온 열망과 소원을 채우는 일이었다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바라는 것을 잊지 않고 끝끝내 이루어내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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